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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대회에서 알게 된 새로운 내 모습

사실 나 배구 좋아하네

by 김채원

주말에 우리 지역 교직원 배구대회에 나갔다. 미리 얘기하지만 나는 배구를 잘 못한다. 교직원 배구대회 규정상 9명의 선수가 출전해야 하는데, 대회를 앞두고 부상자가 몇 명 생겨 나에게까지 기회가 왔다. 처음에 우리 팀 감독님과 주장은 나를 제일 뒷자리 구석에 세웠다. 연습을 몇 번 하고 나서 내가 배구보다 피구에 적합하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됐다. 공이 나한테 오면 너무 무서워 주저앉거나 도망가기 바빴다. 뛰어난 반사신경을 가진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한 자리 차지하고 서서 계속 민폐만 끼치고 있으니 죽을 맛이었다. 대회 전날, 감독님과 주장이 마지막 회의를 했다. 긴 회의 끝에 나는 라이트 자리에 서게 됐다.


"거긴 공이 잘 안 와. 겁먹지 말고 서 있다가 블로킹 몇 번 하면 돼."

브, 블로킹이요? 그건 뭔데요? 나는 울고 싶었다. 블로킹 속성 과외가 시작됐다. 다시 말하지만 대회는 당장 다음 날이었다. 손을 위로 쭉 뻗고 힘껏 점프를 하라고 했다. 하나, 둘, 점프! 과외를 해주던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정적인 의미가 분명했다. 없는 운동 신경이 몇 시간 만에 생길리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자리로 공이 안 오기를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다.


결전의 날 아침,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나라 여자배구 국가대표 라이트가 누구야?"

"김희진 선수"

그때부터 나는 중얼거렸다.

"나는 김희진이다. 비록 잘생기진 않았지만,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나는 김희진이다. 비록 키는 작지만, 아유 자꾸 뭐라는 거야. 나는 김희진이다. 나는 김희진이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김희진 선수가 되기 위해 주문을 외웠다. 점프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기에 가지고 있는 운동화 중에 굽이 가장 높은 걸 신고 갔다. 그러다 다치면 어쩌냐고 걱정하는 선생님도 있었지만, 나는 내가 다칠 만큼 높이 점프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괜찮았다.


막상 코트에 들어서니 너무 떨리고 긴장이 됐다. 정말 다행인 건 예선전 첫 번째 상대가 우리보다 훨씬 못했다는 거다. 계속 우리 팀 점수만 올라갔다.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 팀은 멋진 플레이를 할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하이파이브를 했고, 실수를 해도 괜찮다며 등을 토닥여줬다. 첫 번째 경기를 2:0으로 이기고 긴장이 많이 풀렸다.


우리는 예선전에서 한 번의 패배도 없이 16강에 진출했다. 경기를 할수록 지치기는커녕 흥분이 고조됐다. 우리 팀 선수가 극적으로 공격을 성공시킨 순간에는 박수를 세게 치다 손바닥에 멍이 들기도 했다. 16강도 가뿐히 이기고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 만난 팀은 우승후보로 소문이 자자한 팀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잔뜩 쫄았을텐데 그날은 조금도 쫄지 않았다. 어쩐지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와 상대팀은 아주 팽팽히 맞섰고 상대팀 선수들 표정은 점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중에는 상대팀 선수들이 공을 때리면서 "아우 씨!"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반면 우리 팀은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8강에서 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최선을 다했기에 아쉽지 않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어 행복했다.


나는 스포츠에 크게 관심이 없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우리 팀이 이겨도 기분이 살짝 좋은 정도지 환호성을 지르며 흥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배구대회에서는 경기를 뛰는 내내 흥분 상태였다. "나는 김희진이다."라는 마법의 주문도 효과가 있었고, 격려하고 지지해주는 우리 팀 분위기 덕분이기도 했다. 배구를 할 때는 개인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팀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달았다. 나에게 짜릿한 경험을 안겨준 우리 팀 선수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존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사실 나는 배구를 좋아한다는 거다. 내일모레 마흔인데 아직도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이 있다는 사실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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