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해냈다.
오늘은 글쓰기 싫다. 바쁘고 피곤하고 우울하다. 그럼에도 이렇게 타자를 치고 있는 건 오늘 꼭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30분 동안 텅 빈 모니터를 보며 커서가 깜빡이는 속도에 맞춰 쓸까, 말까, 쓸까, 말까, 쓸까, 말까 고민했다. 쓰기도 싫고 쓸 것도 없다. 그런데 써야 한다. 쓸까, 말까, 쓸까, 말까, 쓸까, 말까...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나는 보통 그냥 하는 편이다. 억지로, 꾸역꾸역, 해치워버리자는 심정으로 투덜대면서, 징징대면서 울면서 해낸다. 그런데 글쓰기는 억지로가 안된다. 글을 쓰려면 주제를 정해야 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글로 풀어내야 한다. 쓰기 싫은 마음이 정신을 지배하고 있을 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마음으로는 생각이 막히고 구성이 꼬인다. 협박을 하든 달래든 어떻게든 나를 움직일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오늘 내가 글을 꼭 써야 하는 이유는, 글쓰기 루틴 만들기 프로젝트 <글루틴>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참여도 아니고 무려 글루틴을 운영하는 글쓰기 인사이터다. 글쓰기를 습관으로 만들자고 작가님들을 모아놓고 내가 글을 안 쓰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거다. 게다가 내일은 인사이트 나이트 오프라인 모임이 있는 날이라 글루틴 작가님들 중 몇 분을 실제로 만나게 된다. 그러니 오늘은 더더욱 글쓰기 루틴을 지켜야 한다. 다른 걸 다 떠나서 해야 할 일을 안 했을 때 느낄 찝찝함을 견디는 건 끔찍한 일이다.
해내고 나면 앓던 이가 빠진듯한 후련함을 느낄 거다.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뭐라도 하나 만들어냈으니 뿌듯함도 느낄 거다. 더 나아가서 이런 컨디션으로도 해 낸 나 자신이 자랑스러울 거다. 앞으로 못할 일이 없겠다는 자신감도 생길 거다. 그때의 그 기분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다. 그리고 지금 하기 싫은 마음과 비교해 본다. 내가 더 느끼고 싶은 마음은 해낸 뒤의 마음이 아닐까?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해야 할 일을 해낸 뒤로 미룬다. 글을 다 쓰고 개운한 마음으로 씻으려고 아직 씻지 않았다. 갑자기 글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면 잠시 코를 막아도 좋다. 하루의 피로를 따뜻한 물로 씻어내고 싶다면, 나는 글을 써야 한다.
이렇게 완벽하게 세팅했는데도 글을 쓰기 싫다. 부족한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맥주?
글 다 쓰면 샤워하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시기로 마음먹었다. 갑자기 머리가 바쁘게 돌아간다. 오늘은 글쓰기 싫다면 쓰기 싫은 마음을 글로 써 보기로 했다. 쓰기 싫은 마음만 풀어내면 결국 징징거리는 하소연으로 끝날 테니 내가 이 마음을 극복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써 보기로 했다. 이제 끝이 보인다. 나는 결국 오늘도 해냈고, 글루틴 작가님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으며 내일 모임에서 만나도 큰 소리로 인사할 수 있다. 아직 글을 쓰는 중인데도 벌써 후련하고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이제 기분 좋게 샤워하고 맥주 한잔 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