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어른이 됐다.
드디어 할머니가 인정하셨다.
감사하게도 나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시지만, 안타깝게도 80대인 두 분은 건강이 좋지 않다.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더 편찮으신데 할아버지는 몸 이곳저곳에 이상신호가 발견되어 자주 병원을 찾으시는 데다 치매가 심해서 뭘 하고 있었는지 까먹을 때가 많다. 어제 있었던 일은 물론이거니와 10분 전에 있었던 일도 기억이 안 나 되물으시기도 한다. 세월이 흐르면 나이가 들고 늙는 게 당연한 이치인 걸 알면서도, 기력 없이 작은 방에 누워 꼼짝을 안 하는 할아버지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두 분이서 시골 마을에 살고 계신다. 딱히 보호자가 없는 상황이라 엄마는 늘 할머니 할아버지 걱정을 달고 산다. 여러 번 엄마 집으로 모셔오려고도 해 봤으나 절대로 그 동네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셔서 안타까워하고만 있을 뿐이다. 대신, 엄마가 주말마다 반찬을 해서 가져다 드리고 청소도 해드리고 병원도 모시고 가고 있다.
지난 주말은 할아버지 생신이었다. 엄마와 나는 평소보다 더 정성껏 반찬을 준비했다. 온갖 나물에, 미역국, 직접 쑨 도토리묵, 그리고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제육볶음과 상차림을 근사하게 만들어줄 훈제오리 무쌈말이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할아버지댁을 찾았다.
할머니는 생전 처음 보는 훈제오리 무쌈말이에 관심을 가지셨다. 머스터드 소스에 찍어드시라고 알려드렸더니 아주 맛있게 드셨다. 할아버지는 생신날에도 기력이 없어 힘들게 밥 한 공기를 드셨지만, 그럼에도 나한테 허리 펴고 똑바로 앉으라는 말은 잊지 않으셨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하나라도 더 드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드셔보시라고 계속 권했다.
"미역국이랑 제육볶음은 채원이가 한 거야."
할머니는 눈이 동그래져서 나한테 물으셨다.
"아가, 니가 이런 것도 할 줄 아냐?"
나도 내일모레 마흔인데 할머니한테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가였다.
할아버지가 말없이 미역국과 제육볶음을 드시는 모습을 보며 엄마는 도토리묵은 직접 쒔으니 잡숴보시라고 했다. 할머니는 또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시고는 "도토리묵도 쑬 줄 아냐? 너도 이제 어른 다 됐다." 하셨다. 나는 올해 예순이 된 엄마가 어른이 다 됐다는 소리를 듣는 걸 보고 웃음이 나는 걸 참느라 혼났다.
생각해보니 지난 추석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고모가 작은 아빠 머리에서 흰머리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본 거다.
"너도 벌써 흰머리가 나냐?"
참고로 작은 아빠는 작년에 예순이셨다. 흰머리가 안 나는 게 이상할 나인데 누나에게는 여전히 막냇동생일 뿐이었나 보다.
어쩌면 시간은 절대적인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60초가 쌓여 1분이 되고, 24시간이 쌓여 하루가 되며, 12개월이 쌓여 1년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부모에게 자식은 여전히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고 자식에게 부모는 존재자체만으로 든든한 버팀목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