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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Jun 27. 2023

쪽팔릴 용기가 없어서

누구는 나에게 양심이 없다고 했지만

살면서 가장 쪽팔렸던 일을 쓰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내 뇌의 쪼글쪼글한 주름을 한 겹 한 겹 펼쳐가며 쪽팔린 기억을 찾아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쪽팔림에 가까운 기억 하나를 찾아서 한참을 써 내려가다가 그날 내가 느낀 감정이 '쪽팔림'이 아니라 '어이없음'이었음을 확인하고 다 지웠다.


20대 초반이었던 내가 맘모톰 시술을 받고 6인실에 누워있을 때였다. 맘모톰이란, 유방에 생긴 종양을 적출해서 양성인지 악성인지 확인하는 조직 검사를 말한다. 내가 있던 병실에서는 딱 봐도 내가 제일 어려 보였다. 다른 환자를 병문안하러 온 손님들이 나를 자꾸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들은 어차피 나한테 다 들릴 정도로 의미 없게 목소리를 낮춰 서로 속닥거렸다.


"저 환자는 아가씨 같은데? 아가씨도 유방에 종양이 생기나 보네."

"아니 근데 가슴도 없는데 어떻게 종양이 생겼지?"


여기저기서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하는 헛수고의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가슴이 없는 게 아니 작은 것이고, 변명하자면 시술이 끝난 직후라 붕대로 가슴을 동여매서 더 없어 보인 것이지만 붕대를 풀어도 큰 차이는 없었기 때문에 변명하기도 애매했다.


아무튼 가장 쪽팔린 기억으로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나는 쪽팔리지 않았으므로 괜히 없는 쪽팔림을 있는 쪽팔림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일주일이나 쪽팔림을 찾아 헤매는 나를 보며 남편은 한마디 했다.

"쪽팔린 일이 없다고? 많을 텐데? 그냥 양심이 없는 거 아니야?"


그때부터 나는 쪽팔림 찾기를 그만두고 쪽팔린 기억이 없는 원인 찾기에 나섰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가설 두 가지를 찾아냈는데 하나는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쪽팔림은 너무 강력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뇌가 기억을 모두 지워버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쪽팔릴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설을 찾아냈을 때는 갑자기 쪽팔림이 느껴졌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 '쪽팔림을 무릅쓰고'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를 얻거나 이루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쪽팔림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야 하는데 나는 그 정도 용기를 내어본 적이 없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나 자신에게 쪽팔린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나는 안전빵을 좋아한다. 몸도 마음도 관계도 안전한 게 좋다. 상대방이 나에게 확실한 호감을 보이지 않으면 먼저 말 거는 것도 피하고 빨강과 파랑을 넘나드는 주식보다는 차곡차곡 쌓아가는 적금이 더 좋다. 여유가 있는 날이면 바람을 쐬러 나갈까 하다가도 중간에 길을 잃지는 않을지, 주차 공간은 여유가 있을지, 혹시나 그곳에서 15년 전에 헤어진 백스물다섯 번째 전남친을 우연히 마주치지는 않을지 같은 쓸데없는 상상을 하다가 안전하게 집에 있는 것을 택할 때도 있다. 그러니 남들보다 쪽팔릴 기회가 적을 수밖에. 


이렇게 안전제일 마인드로 살다 보면 남들에게 쪽팔릴 일은 적겠지만 나 자신에게 미안할 때가 있다.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감정과 욕구를 꾹꾹 억누르고 살아가니까. 그래서 앞으로는 쪽팔릴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막상 해 보면 또 별거 아닐 것 같다. 혹시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쪽팔림을 경험한다면 기특한 나의 뇌가 재빨리 기억을 지워줄 거라 믿는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살면서 가장 쪽팔렸던 순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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