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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Feb 17. 2020

도를 아십니까

그는 진짜 도를 아시는 것 같았다

청소를 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택배겠거니 하고 등을 길게 돌려 인터폰 화면을 바라봤다. 60대 정도 되어 보이는, 화장을 곱게 한 여성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웃 동네에 살고 있는데요~"

인사말이 길어지는 것이 영 찝찝하다.

"우리가 모르는 미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인터폰으로 좀 알려드리려구요."

"괜찮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역시나. 찝찝하더라니까. 그래도 이렇게 딱 잘라 거절하다니 , 많이 발전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쩌다 보험을 권유하는 전화를 받으면 보험을 들 것도 아니면서 끊지를 못하고 연신 "네~네~ 그렇군요~" 하고 대답을 이어 나가 결국에는 전화를 건 쪽에서 먼저 "저죄송한데 이제 점심시간이라 밥 먹으러 가야 되는데 전화 끊어도 될까요?"라는 말을 하게 한 사람이다. 내 얼굴에는 '거절 못함'이라고 써 있기라도 한 건지 유독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아직 봄의 기운이 구석구석 미치지 못한 3월의 어느 날,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캠퍼스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는데 정장을 잘 차려입은 아저씨가 다가왔다.

"호랑이띠 음력 1월생?"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정확히 맞춘 것이다.

"네.. 그, 그런데요?"

"잠깐 앉아서 이야기 좀 할래요?"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처음 본 아저씨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아저씨는 이상한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저 건물 뒤에 있는 게 보이나요?"

"아니요."

"그렇다면 저 건물 뒤에는 아무것도 없을까요?"

"그건 아니죠. 뭐라도 있겠죠."

"바로 그거예요. 세상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이 있어요."

씨.. 이게 바로 '도를 아십니까'구나. 이미 벤치에 나란히 앉아버렸고 아저씨는 말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손에 있는 휴대폰은 나를 기다리는 친구의 전화로 쉼 없이 울렸는데 아저씨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 이미 아저씨의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아저씨를 벗어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겨우 아저씨와 헤어져 친구를 만나서 방금 겪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나 방금 신기한 아저씨 만났어. 내 얼굴을 보자마자 호랑이띠 음력 1월생이냐고 물어봤다니까! 진짜 대단하지 않아?"

친구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너 바보 아니야? 만나는 사람마다 호랑이띠 음력 1월생 아니냐고 찔러보고 다니다가 그냥 니가 걸린 거겠지."

그런 거야? 상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이 있고, 나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아는 것들도 있구나.


몇 달 뒤에는 자취방에 누가 찾아왔다. 은 여자가 목이 너무 마르다며 물 한잔만 달라고 했다. 순진했던 건지 멍청했던 건지 나는 아무 의심 없이 문을 열어줬고 문 뒤에는 남자도 한 명 있었다. 둘은 물을 마시고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 앉았다.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더니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옛날 정읍에 강 씨 성을 가진 누군가가 살았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씨.. 또 당했어.'

길고 긴 이야기 끝에 그들은 나에게 돈을 요구했고 천 원인가 오천 원인가를 쥐어주고 보냈다. 그들이 돌아간 뒤에 기억에 남는 말들을 인터넷에 검색했더니 처음 듣는 종교가 나왔다. 그리고 그 종교에 빠진 가족을 둔 피해자 모임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가족이 그 종교단체에 돈을 몰래 갖다 바쳤다거나 행방불명이 됐다는 얘기들이 가득했다. 생각보다 무서운 거였잖아. 그런 사람들 꼬임에도 따라가지 않고 돈이나 몇 푼 쥐어주고 보낸 나의 똑부러짐이 스스로 대견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또 몇 달이 지나고 울이 왔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혼자 걷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봤더니 아저씨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만난 적 있죠?"

호랑이띠 음력 1월생을 맞춘 그 사람이었. 거의 1년 만이었는데 나를 알아본 것이다. 그는 이번에는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고 그대로 홀연히 사라졌다. 내 옆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한동안 멈춰있었다. 그는 진짜 도를 아시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봤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도인을 만난 신비한 경험을 혼자만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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