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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Mar 02. 2020

지방 사람의 서울 구경

지하철 구경만 실컷 했다

서울에 갈 일이 생기면 설레면서도 긴장된다. 서울에 갈 일이라고 해봤자 몇 년에 한 번, 지인의 결혼식이 전부이긴 하지만. 텔레비전이나 영화, 책에서는 서울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을지로, 홍대, 이태원을 모두가 알 거라고 가정하고 이야기한다. 전남 순천에 사는 나는 그게 어딘지 몰라서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속으로 생각한다.

'너네 혹시 신대지구는 아니?'

괜히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언젠가는 서울에서 살아보고 싶어 진다.


그러다 청첩장을 받았는데 예식장이 서울이면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드디어 그 유명한 서울 구경을 할 기회가 온 것이다. 한편으로는 긴장도 된다. 지방 사람인 거 티 나면 어떡하지? 다들 자연스러운 일상을 걷고 있는데 나 혼자  삐걱댈까 봐 걱정이 된다. 지방에 사는 게 잘못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닌데 괜히 주눅이 든다.

 

그래도 내가 아무렇지 않게 혼자서 그 복잡한 서울을 갈 수 있는 건 지하철 덕분이다. 출발지와 도착지만 입력하면 지하철 무슨 역에서 몇 호선을 타고 어디에서 몇 호선으로 환승하고 무슨 역 몇 번 출구로 나가면 되는지까지 스마트폰이 다 알려준다.  지하철역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길을 몰라 헤매는 지방 사람이 아니다. 안내판이 가리키는 화살표만 따라가면 목적지에 정확히 도착한다.


그렇다고 하철역에서 전혀 긴장되지 않는 건 아니다. 서울 사람들만의 문화를 눈치 빠르게 캐치해서 자연스럽게 따라 하려고 사람들을 관찰한다. 아주 오래전에는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줄 서기를 하더니 몇 년이 지나니 갑자기 두 줄 서기를 하고 그러다 또다시 한 줄 서기를 한다. 몇 년에 한 번 지하철을 타는 나는 이번에는 에스컬레이터를 어떻게 타야 하는지 유심히 지켜본다. 비슷비슷한 검정색 외투를 입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줄을 서는 서울 사람들이 너무도 질서정연해서 컨베이어벨트 위의 물건들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간신히 지하철을 타고 또 주변을 살핀다. 대놓고 두리번거리면 지방 사람 같으니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서울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는지, 머리는 어떻게 하고 화장은 어떻게 하는지 관찰한다. 끔 자기만의 패션 철학이 확고해 보이는 사람을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 내가 순천에서 보던 사람들과 비슷하다. 여기까지 확인하고 나면 자신감이 조금 생긴다. 서울 사람들, 별 거 없네.


지하철은 빠르게 다음 역에 도착한다. 신반포, 고속터미널, 신논현. 계속되는 안내 방송을 들으면서 '아, 여기가 거기구나.' 하는 생각에 나도 더 이상은 이방인이 아닌 것 같다. 서울은 넓다. 서울을 한 바퀴 돈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쯤 목적지에 도착한다. 몇 번 출구였는지 기억이 안 나서 다시 스마트폰을 검색한다. 또다시 화살표를 따라 지하철역을 나선다. 햇빛이 눈부시다. 여의도도 가고 노량진도 갔는데 내 기억에 남는 건 회색의 지하철역과 회색의 지하철, 그리고 안내방송 배경음악뿐이다. 지하철 구경만 실컷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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