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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보면 사람이 보인다

한동안 브런치 글을 안 올렸던 이유

by 김채원

예전에 어떤 남자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연애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뭐예요?"
"음.. 표현하는 거요. 뭐든 잘 표현하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내 대답을 들은 이 남자,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가장 최근에 남자친구랑 헤어진 이유가 그거죠? 남자친구가 표현을 잘 안 해서?"

순간 당황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남자친구랑 헤어진 이유가 그거 하나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나는 남자친구가 표현을 잘 안 하는 걸 못마땅해 했었다.
그는 곧이어 말했다.
"저는 표현 잘 해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라고.'
그는 나와 사귀고 싶어 했고 나는 거절했다. 왜냐면 질문 하나로 내 이별 사유를 알아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 오만함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를 거절한 뒤 내가 남자를 만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잘난 척을 하지는 않는가'가 되었다.

평소에 습관처럼 하는 인사말에도 지금 내 상황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나는 보통 친구의 부모님을 뵈면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라고 인사한다. 작년에는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를 몇 년 만에 만나 뵙게 되었다.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안녕하세요? 건강하시죠?"라고 했다. '건강하시죠'라는 다섯 글자는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말이라서 그 말이 입에서 만들어져 나가는 모든 순간이 어색했다. 말을 뱉어 놓고 아차 싶었다. '왜 갑자기 건강하시냐고 물어봤지? 요즘 건강이 안 좋으시면 어쩌지? 갑자기 내 앞에서 큰 병을 앓는 중이라고 고백하시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다행히 친구 아버지는 건강하셨다. 그러니까 그때, 내가 친구 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우리 엄마가 갑상선암 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엄마가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을 때부터 암, 항암, 수술 같은 것들이 내 머릿속을 차곡차곡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도 건강하시냐는 인사를 한 게 아닐까.

인정하기 싫지만 그 잘난척쟁이의 전략은 꽤 쓸만한 것이었던 것 같다. 대화를 보면 사람이 보인다. 한 사람이 말할 때 쓰는 단어, 문장, 말투 등에는 그 사람이 지금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지, 어떤 tv 프로그램을 즐겨보는지가 담겨있다. 그럴듯하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거다. 관심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글을 봐도 사람이 보일까? 내가 그동안 쓴 글의 제목을 쭉 훑어봤다. 평범한 일상을 주로 쓴 내 글에는 당연하게도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지 다 보였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생각이 바뀐 경우도 있었다.

'예전엔 내가 이렇게 생각했구나. 지금은 아닌데.'

사람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변화는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한 번 글로 써서 발행해버린 내 생각은 다시 고치기가 어렵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으니 글을 삭제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면 남는 게 있을까 싶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 않은 지 한달이 넘었다. 그동안에도 블로그에는 매일 한 두편의 글을 썼다. 그런데 왠지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쓰는 브런치글은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지금 내 생각이 글로 써도 좋은 생각이라는 확신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 글을 보고 내 생각을 형편없다고 생각할까봐 걱정됐다. 나중에 내가 내 글을 읽고 부끄러워할까봐 두려워졌다.


'영원한 진리는 없다는 말이 영원한 진리'라는 말을 좋아한다. 내 생각은 계속 변하지만 어쩌면 처음에 했던 생각이 더 좋은 생각일 수도 있다. 내 생각의 변화가 발전이 아니라 퇴보일 수도 있고 발전도 퇴보도 아니고 방향만 바뀌었을 수도 있다.


다시 글을 써보기로 했다. 글은 독자가 읽어줬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믿는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앞서 말한 잘난척쟁이처럼 자신만만하게 나를 판단할수도 있고, 내 글을 꾸준히 읽어주는 고마운 누군가가 '이번 글은 별로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같은 글을 읽어도 내가 처한 상황과 내 기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나 누가 읽어도 좋을 글은 감히 내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글을 읽고 공감해주는 분이 한 분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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