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으로 싫어하는 사람을 염탐하는 찌질이
그게 바로 저예요
안녕하세요? 김채원이라고 합니다.
직업은 초등학교 교사구요,
지금은 육아휴직 중이에요.
자기소개를 해야 되는 상황이 생기면 이렇게 말하곤 해요. 이름과 직업은 필수라고 생각해서 먼저 말하고, 백수도 아닌데 너무 한가한 걸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육아휴직 중인 것도 밝히죠. 나이는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말하지 않아요. 삼십 대가 된 이후 나이를 말하는 게 싫어졌기 때문이에요. 이 자기소개가 저를 잘 표현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제가 밝히고 싶은 정보만 공개했거든요. 사실 전 열등감 덩어리예요. 뭐부터 말해야 할까요? 까무잡잡한 피부도, 퉁퉁 불은 오뎅처럼 못생긴 손가락도, 광대와 턱이 도드라진 얼굴형도, 반곱슬 머리카락도 모두 마음에 안 들어요.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죠. 하얀 종이 위에 멋진 그림을 그려내는 친구들, 막힘 없이 고음을 내며 노래하는 친구들, 100m를 저보다 3,4초나 더 빨리 달리는 친구들을 보며 마냥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도 특별한 재능이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이런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어요. 외출할 때마다 파운데이션으로 피부톤을 밝게 만들었구요, 고데기로 머리카락을 곧게 폈어요. 가장 큰 콤플렉스인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당당한 척했어요. 그래서 그 콤플렉스들이 사라졌냐구요? 아니요. 오히려 열등감만 커졌어요. 밖에서 실컷 잘난 척을 하다가 코딱지만 한 집에 돌아와서 화장을 지우고 목이 늘어난 티에 무릎 나온 바지로 갈아입었을 때의 그 심정, 짐작하실 수 있나요? 코르크 마개로 꼭꼭 막아놓은 열등감이 탄산처럼 터져 나오는 것 같았어요. 저를 부정하고 현실을 외면해도 저는 저였고 여전히 초라했어요.
열등감이 심해질수록 다른 사람들과 저를 더 열심히 비교했어요. '저렇게 날씬한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저렇게 비싼 차는 도대체 누가 타는 거지?' 비교하면 할수록 저는 더 형편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인스타그램이 추천해준 친구 목록을 보다가 아는 이름을 발견했어요. 중학교 때 저희 집이 가난하다고 비웃던 친구였죠. '아직 잘 살고 있을까?' 궁금한 마음이 그 친구의 프로필을 누르게 했어요. 그 친구는 여전히 잘 살더라고요. 아니길 바랬는데 말이죠. 좋은 집에, 외제차에, 명품은 또 왜 그렇게 자주 사는지요. '어휴, 약 올라.' 인스타그램을 닫으면서 괜히 열이 받았어요. 그리고 제가 얼마나 찌질한지 알게 됐어요. 그 친구가 못 살길 바랬던 것도, 굳이 그 친구의 일상을 들여다본 것도, 그리고 그 친구가 잘 산다고 약 올라한 것도요. 정말 못났지 뭐예요.
전 그래요. 인스타그램에 셀카를 올릴 때는 보정이 잘 된 사진만 올려요. 실물보다 100배는 예쁘게 나온 걸로요. 마치 자기소개를 할 때처럼 공개하고 싶은 부분만 공개하죠. 그 친구도 분명 힘든 일이 있을 거예요. 그런 일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리진 않은 거겠죠. 인스타그램만 보고 그 친구의 인생이 완벽할 거라고 생각했다니 좀 어리석었구나 싶어요. 우리는 인스타그램으로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해요. 어쩌면 사실은, 연출한 장면과 보정된 사진을 공유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는 동안 저는 제 자신도 속이려고 했구요. 못난 부분을 감추고 외면하면서 다른 사람의 잘난 부분을 부러워했죠. 그럴수록 제 영혼은 시들어가는걸 그때는 몰랐어요.
이제는 이 모든 게 '저'라는 걸 인정해요.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집에서는 두 딸의 엄마로 사는 사람, 특별한 재능은 없지만 글쓰기에 관심이 있어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 소주를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싫어하는 친구의 인스타그램을 염탐하고 약 올라하는 찌질한 사람. 그게 바로 저예요. 그렇다고 저의 못난 부분마저 사랑하지는 않아요. 그냥 인정할 뿐이죠. 인정하기만 했는데도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열등감을 받아들이고 나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저를 더 저답게 만들어주는 거라고 굳게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