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흰머리를 뽑는 기분이란
나이를 실감하는 순간들
지금처럼 더운 여름이었다. 선풍기 한 대가 구석에서 방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앉아계신 큰엄마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쓸어 넘기며 흰머리를 찾고 있었다.
"흰머리 하나에 10원, 대신 검은 머리 뽑으면 니가 100원 줘야 해."
큰 엄마의 농담에 혹시나 검은 머리를 뽑게 될까 봐 선풍기처럼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흰머리가 확실한 것들만 족집게로 쏙쏙 뽑아냈다. 뽑은 흰머리는 검은 리모컨 위에 가지런히 올려놨다. 가끔 반은 검고 반은 흰 것도 있었는데 그런 건 모두 흰머리로 쳤다.
남편이 작년에 마흔이 됐다. 마흔이 된 걸로 어찌나 엄살을 부리던지.
"마흔이라 그런지 너무 피곤해. 너도 내 나이 돼 봐."
어휴, 나도 곧 마흔 될 거니까 조용히 좀 했으면. 내 무릎을 베고 누워서 징징거리는 남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넘기다가 흰머리를 발견했다. 헉, 벌써? 손 끝에 힘을 주어 흰머리를 뽑아 남편한테 보여줬다.
"오빠 벌써 흰머리도 났어."
"흰머리 아니고 새치겠지."
남편은 방금까지도 자기가 늙었다고 칭얼거리더니 진짜로 늙었다는 증거를 들이밀자 발뺌을 했다. 나는 심각하게 남편의 머리카락을 계속 쓸어 넘겼다. 한참을 들여다본 끝에 흰머리를 2개 정도 더 뽑을 수 있었다.
남편의 머리에서 처음 흰머리를 발견한 지 1년이 지났다. 며칠 전, 남편과 나란히 앉아있다가 남편 귀 옆에서 흰머리를 발견했다.
"어? 흰머리다!"
뽑으려고 봤더니 그 옆에도 그 위에도 흰머리가 제법 보였다. 작년엔 한참을 들여다봐야 겨우 한 두 개 보였는데 이제 손도 안 대고 찾아낸 흰머리가 다섯 개가 넘었다.
"오빠, 가만있어봐. 흰머리 진짜 많아."
"아아아, 아파 아파. 그만해."
"아유, 쫌만 참아봐. 보이는 것만 뽑고 그만 뽑을게. 자, 이거 봐봐. 진짜 많지? 나 진짜 잘 뽑지?"
잠깐 사이에 흰머리가 제법 모였다. 남편은 누가 봐도 침울해 보였고 나는 애써 밝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침울했다. 25년 전, 큰엄마의 흰머리를 뽑을 때 큰엄마 목덜미에서 나던 부드럽고 은은한 비누향이 아직도 코끝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이제는 남편의 흰머리를 뽑고 있다니.
나도 5년쯤 뒤에는 흰머리가 생길 거라고 예상해본다. 그때쯤이면 불어난 뱃살과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 넓어진 모공을 다 받아들이고 '흰머리, 너도 환영한다!' 하고 박력 있게 맞이해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살면서 내가 나이 들었음을 느끼는 순간들이 많지만 이렇게 확실하고 눈에 보이는 증거들은 더 반갑지 않다. 내 머리에서 흰머리를 발견하고는 "야, 너도 이제 늙었다 늙었어."하고 놀려댈 남편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약이 오른다.
그나저나 흰머리를 뽑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스마트폰을 들고 검색해봤다. 흰머리를 뽑아도 그 자리에는 또 흰머리가 나며, 흰머리를 뽑으면 모공에 자극을 주어 더 이상 머리카락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보기 싫은 흰머리는 가위로 잘라내거나 염색을 하는 것이 좋다고. 이미 남편의 흰머리를 잔뜩 뽑아 자랑까지 했는데 어쩌지. 이건 남편 모르게 나만 알고 있어야겠다. 5년쯤 뒤에 남편이 내 흰머리를 뽑아주겠다고 하면 그때 말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