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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죽지않는돌고래 Feb 15. 2019

‘애는 언제?’와 ‘둘째는?’이라는 고대문명 언어

새벽의 육아잡담록 19

1.

한국인 유투버(영알남YAN)가 친한 흑인 친구들과 '니거'라는 단어에 대해 얘기하는 영상이 있다. 그중 한 친구의 말이 인상 깊다.


‘니거라는 단어 뒤에는 너무 많은 역사가 있어. 우리가 갖지 못했던 (지배자들의) 힘으로부터 온 단어거든. 백인은 그들의 방식으로 사용했지만, 우리가 되찾아온 거야.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거지. 그 저변에 깔린 태도를 바꿔버린 거야.


니거는 에티오피아의 니거스(NEGUS)에서 왔어. 우리를 비하하는 단어였지만 원래 왕족을 가리키던 단어야. 그래서 흑인끼리 니거라고 부르면 형제라고 부르는 것도 있지만, 높여주는 표현인 거지.


근데 백인이 와가지고선 왜 너희끼리만 쓰는데?,라고 하면, 너희들은 우리를 노예로 부리던 특권이 있었잖아?,라고 묻고 싶어. 흑인끼리 높여주는 말을 왜 지배자였던 너희가 쓰는 건데? 오버하지 말라구.‘


2.

인간에겐 발성기관이란 게 있어서 의미가 있든 없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아쉽게도 말이지요). 국가, 지역, 세대마다 많은 역사가 숨어있기에 한 울타리 안의 인간들 외에는 함부로 쓰면 곤란한 말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위의 ‘니거’가 있다.


‘니거’급은 아니지만(그렇다고 말해버리면 엄청 실례지요) 놀랍게도, 한국에도 이와 유사한 말이 몇 가지 있다. 같은 반 친한 친구끼리는 ‘너 몇 등했냐’라고 물어볼 수 있다. 큰아버지가 이 말을 하면 나중에 부도가 났을 시, 조카들이 ‘줄을 서시오!’하고 채무자들의 줄을 잘 정리해 줄 수도 있다.


대학에서 몇 년간 함께 룸메이트를 하며 실연의 아픔과 삶의 대소사를 함께 나눈 동기끼리는 ‘야, 너 취직은 됐냐. 뭐 먹고살려고 그러냐’라고 물어볼 수 있지만 고모부가 이 말을 하면 나중에 직장에서 잘렸을 때, ‘앞으로 뭐 먹고살려고 그럽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다.

 

아아, 참으로 위험한 말들임에 틀림없다. 악의 없이 순수하게 물어봤다고 하는 사람은 악의 없이 순수하게 때리겠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는 법, 필히 조심해야 한다.  

     

3. 

결혼을 한 후, 나는 이런 말들이 유구한 역사성을 가진 것도 모자라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는 걸 알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체력과 근성이 함께 갖춰줘야 버틸 수 있다는 소나기 펀치, 즉,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이후에 등장하는 말로, 대표적으로 ‘애는 언제 가질 계획이니?’와 ‘둘째는?’ 이 있다. 이 말은 도움을 줄 수도 없고 도움을 주더라도 법적으로 곤란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아니, 법 이전에 도덕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라 도움을 주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수명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이 말을 할 수 있는 건 가족이나 친구 정도로 알고 있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게 의외로 또 그렇지가 않다. 정밀히 하면 ‘사이가 좋은 가족’ 또는 ‘친한 친구’ 정도여야 한다. 


그래야 ‘그저 가족’이나 ‘그냥 친구’로 한 단계 내려갈 수 있지, ‘그저 가족’에서 말했다간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가족'으로, '그냥 친구'에서 말했다간 ‘오래 두고 가까이 때리고 싶은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

시간차를 두고 '애는 언제 가질 계획이니?'와 '둘째는?'을 냅다 꽂은 다음, ‘옛날엔 일곱여덟 명도 낳았는데!’와 ‘애는 지 밥숟갈 지가 물고 태어난다!’까지 나오면 가히 콤비네이션이 완성됐다 할 수 있겠다. 


이 말들은 고대 문명사회에서 배우자가 독박육아를 했기에 자신은 육아에 대한 포괄적 경험이 없다는 무지를 스스로 뽐내거나, 대가족 육아 밖에 경험한 적 없기에 ‘어라? 아이는 저절로 크네?’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고대 언어의 한 형태로 추정된다. 


이제는 TV라는 것도 존재하는 데다 놀랍게도 인터넷이란 게 존재하기에 저런 말을 입 밖에 냈다간 문명인 취급을 받지 못하니, 아아,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허나 세상엔 현대문명과 고립되어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피해 자신만의 언어로 살아가는 부족도 있는 법, 모름지기 '현대인의 육아'를 하는 자라면 각자의 문명을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도 필요하다. 


고대 문명사회의 부족들은 학살이나 전염병 등에 대한 두려움이 큰 지라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커 대개 공격적이란 점을 이해하자. 섣불리 접근했다간 창이나 활로 공격할지 모르니 현대인들은 각별히 주의해 슬기로운 현대인의 육아생활이 흔들리지 않도록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진은 106일 된 하루입니다. 아이가 현대문명의 이기를 아니꼬워할 줄은 저도 예상치 못한 부분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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