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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죽지않는돌고래 Mar 02. 2019

거기엔 흑발에, 젊고 건강한 시절의 할머니가 있다

새벽의 육아잡담록 22


1.

어린 시절, 압도적으로 시간을 보낸 사람은 할머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맞벌이였고 할아버지는, 으음, 남자들의 대화란 나이가 들면 어물쩡 줄어드는 법이다.


2.

익숙함은 때때로 두려운 일이다. 익숙해지면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으면 핵심 요소를 잊는다. 해서 자식은 부모의 노고와 사랑을 잊고 부모는 자식의 기쁨과 행복을 잊는다. 누구라도 잊어버리는 순간이 온다.


3.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대학생 시절, 방학이라 부산에 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외출했고 할머니와 단둘이다.


할머니는 멍하니 TV 보고 나도 멍하니 컴퓨터 본다. 할머니의 단기 기억력이 점점 떨어져 같은 질문 계속해 귀찮다. 간만에 친구 만나고 싶어 나갔다 온다 하니, 할머니는 나가지 말라 한다.


나갈 거야, 나가지 마, 투닥거리다,


‘나도 외롭다’


4.

그 말은 커서 여태껏 지울 수 없다. 할머니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다. 그런 감정이 있다는 사실 조차, 나는, 평생 인지하지 못했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해 여름이 오면 팥 아이스크림 100개를 사 오라고 만 원을 주던 타입의 양반에게(비비빅이 100 원하던 시절이 정말로 존재했습니다. 저는 비비빅보다 석빙고 파이긴 했습니다만) 외롭다는 감정이 있을 거라곤, 스무 살의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5.

며칠 후다. 잠시 외출 후, 집에 돌아왔다. 할머니가 창밖을 보고 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현관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넓은 거실, 창밖 어딘가 보고 있을 할머니 등을, 식탁에 앉아 본다.


10분쯤 지났을까. 돌아본다.


‘놀라라. 언제 들어 왔노, 밥 뭇나’


6.

결혼 후 10년이 넘었을까. 남편은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다. 감시가 따라다니고 틈나면 고문당해 검은 차가 어딘가에 던지고 간다. 서대문 형무소에 간다. 땅이 사라진다. 돈이 사라진다. 집이 사라진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호칭과 8남매가 남는다.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긴 하지만 50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다. 그 시간이 가지는 의미를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이따금, 나의 어린 시절, 그 8남매의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결국 시장에서 배추 장사를 했는데 김칫독이 오르니까 손톱이 다 빠지더라고.’


7. 

눈을 감으면 거기엔 흑발에, 젊고 건강한 시절의 할머니가 있다.


부산 구서동 오시게장, 작고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시끌벅적한 시장을 걷다 매번 수수전을 사주던 8남매의 어머니가, 나의 할머니가, 등 뒤에 있다.



나를 키운 할머니와 내가 키운 하루...라고 하면 아내에게 혼날 테니까, 나를 키운 할머니와 아내와 내가 키운 하루.


추신: 아내가 수수전을 만들어 주어 떠오른 잡담이므로 이 글의 저작권과 인세는 100% 아내에게 주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마치 공기를 주는 느낌이지만 세상에 공기만큼 소중한 게 또 없는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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