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죽지않는돌고래 Feb 26. 2019

9살로 돌아간 날에는 울다 젖은 채로 아들과 노네

새벽의 육아잡담록 21

1. 

일요일 오후 4시 반쯤이다. 아내는 몸이 좋지 않아 눈 붙이고 하루도 기관지염 탓인지 지쳐 보여 제 침대에 누였다.


조리대와 식탁을 닦고 정리한다. 아내가 구운 군밤 옆에 흐트러진 껍질 있어 쓰레기통에 가져간다.


2.

할아버지는 종종 군밤을 구웠다. 부엌 옆 다용도실, 조그마한 화로에 불 때운다. 석쇠 사이에 군밤 예닐곱 개 넣어 화로에 올린다. 이내 파랑, 빨강, 노랑이 소용돌이처럼 말려들어간 문양의 부채로 부채질한다.


나는 할아버지의 따개비가 되어 제 무릎 두 팔로 안고 군밤 익기를 기다린다. 그는 자신만이 아는 시간을 두어 석쇠를 뒤집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타닥타닥.


할아버지가 다 된 군밤 껍질을 작은 칼로 벗겨 후후 불어 건넨다. 나도 후후 불어 하나씩 입으로 가져간다.


아, 맛있다.


3.

어느 가을의 일이다. 할아버지가 군밤 껍질 까다 손바닥을 벤다. 손가락과 손바닥이 닿는 부분부터 팔목 위까지, 벤다.


자로 잰 듯 일직선 생기더니 이내 피가 수욱 솟아오른다. 할아버지는 수건으로 손을 동여 메고 집을 나선다. 약국으로 향한다.


손을 감싼 수건이 빨간 물감 푼 마냥 변해간다. 다른 손은 수건을 움켜쥐고 있다. 무섭다. 나는, 심장이 크게 뛰었다.


할아버지는 졸졸 붙어오는 나를 내려다본다. 미소 지으며,


‘괜찮다.’


4.

아내가 자고 하루도 자는 4시 반쯤의 일요일 오후, 식탁 위 군밤 껍질 치우다 9살로 돌아간 나는, 거실 바닥에 무릎 끓고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는, 아마도 우스꽝스레 일그러진 얼굴로 한참이나 길짐승 같은 소리를 내었다.






작가의 이전글 아기는 반드시 부모의 기대를 배신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