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육아잡담록 - 검사를 받으러 가기 전까지
1.
무릇 아이란, 학교와 가정의 모습이 다른 법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하지만 이건 아마도 이과 계통의 멍청이 녀석이 당연한 말을 그럴듯하게 퍼트린 게 아닐까. 바가지야 부서졌으면 위치 에너지가 달라져도 변함없이 새겠지. 당연한 말로 폼 잡기는...!
문과 계통의 멍청이인 내 관점은 이렇다. 동물 중 가장 다채롭게 엉망진창이라는 인간의 무서운 점은 애초에 새는지 안 새는지도 모르니까 무서운 게다…!
2.
첫째 하루의 경우, 대략 3년 전부터 가족 모두 낮잠 자는 시간에 홀로 깨어있다. 그러니까 토, 일요일에 각각 2시간, 합쳐서 4시간.
주중에는 아침에 먼저 깨서 홀로 1시간 정도 먼저 일어나 자기 방(지금은 놀이방)에 처박혀 뭔가를 뿌시럭댄다. 대략 1달에 20시간 정도는 완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셈이다. 이렇게 몇 년간 방에 틀어박혀 '뭔가'를 하는데 그 '뭔가'가 '뭔가'인지는 모르겠다. 내 잠이 먼저다.
다만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약 17년 정도를 홀로 살며 깨달은 게 있다면, 고립돼서 오랜 시간을 보낸 놈인데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녀석은 믿으면 안 된다는 게다(예외는 나!).
여튼 이 녀석은 겉으론 말을 잘 듣지만 항상 조심해야 한다, 뭐,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3.
벌써 2년 반 전의 일이다. 어느 날과 같은 평범한 주말, 가족 모두 낮잠 시간이 막 종료될 시점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오니 하루가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레고를 만지작 거리고 있다. 낮잠도 잤겠다, 환기를 시킬 겸, 하루방으로 가 본다. 방문 근처에서 무언가 반짝인다. 으응? 아주 잘게 깨진 유리 조각이다....!
아내에게 물었다.
“혹시 컵 깬 적 있남?"
"ㄴㄴ"
자세히 보니 유리 가루 같은 게 여기저기 보인다.
"하루. 뭐 깼어?"
"유리컵 깼어. 근데 다 치웠어."
하루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말했다.
4.
가족 모두의 낮잠 시간 동안, 하루는 투명 유리로 된 무언가를 깨트렸다. 의문은 이 유리컵은 하루가 도달할 수 없는 범위에 있다는 게다.
즉, 나도 의자에 올라가 빼야 하는 높은 찬장 안쪽에 넣어 놓은, 유리 주전자다.
어떻게 뺐는지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우리 집은 ㄴ자형 아일랜드 식탁 형태로 주방이 이루어져 있는데 각 면의 높이가 다르다. 한쪽이 15cm 정도 더 높다.
그러니까 의자에 올라가 ㄴ자 식탁의 가로인 ㅡ 부분에 올라간 후, 거기서 다시 올라가 세로인ㅣ부분으로 이동, 까치발을 들고 천장에 매달려 있는 찬장에서 꺼낸 게다.
문제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찬장과 식탁은 완전히 평행을 이루고 있어 식탁 위에 올라가 찬장에 있는 물건을 꺼내려면 허리를 활처럼 휘어야 하는 불안정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게다.
하루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지 않는’ 타입이다. 룰이 정해지면 굉장히 잘 지키는 데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타입.
몸이 뻣뻣한 녀석이 올라간 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몸을 휘었는지는 미스터리지만(내가 모르는 다른 방법이 있나?) 문제는 뒤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던 게다...!
5.
유리조각을 버리려 쓰레기통을 보니 아직은 증거인멸에 미숙한 티가 났다. 당시 만 4살, 유리는 따로 분리수거를 해야 한다는 걸 아직 몰랐기에 일반 쓰레기에 넣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내가 자잘한 유리 조각을 찾아내어 청소기로 치우고 닦기를 반복하는 동안, 아내가 하루에게 물었다.
“하루야. 손은 안 다쳤어?"
"응"
"유리는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위험해. 왜 엄마한테는 말 안 했니?”
“…?!? 그냥"
"혹시 혼날까 봐 그런 거야?"
"아니. 내가 다 치워서 그런 거야. “
하루는 자기가 놀다가 실수로 깨긴 했으나 좋게 말하면 책임을 다했고(치웠으니) 나쁘게 말하면 증거가 없으니 별 일 아니라는 얼굴을 했다.
6.
아이들은 각자의 기질이 있다. 많은 이들이 유전이냐, 환경이냐 같은 떡밥으로 대화를 나누고 나 역시, 이와 관련한 인간의 속성을 궁금해 해 왔기에 관련된 대가들의 책을 읽는 건 항상 재미있다.
다만 자식을 낳으면 단박에 해결되는 부분이 으마으마하게 많다. 특히 공동육아 같은 걸 하면서 직접 영유아들을 만나게 되면 체험으로 단박에 알게 되는 부분이 굉장하다. 교육이고 나발이고 재능이나 기질에 선천적인 부분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건 태어난 지 딱 1년만 넘어도 알 수 있다.
하루가 태어난 지 2년이 채 되지 못해 느낀 게 있다면, 이 녀석의 특징 중 하나는 룰을 필요 이상 잘 지킨다는 게다. 예를 들어, 나의 어린 시절을 예로 들면 다림질이 취미인 아버지가 다림질을 하고 있으면 자꾸 내가 다리미를 만지려 했다고 한다. 이때 아버지의 방법은 그냥 다리미를 만지게 하는 것이다. 이후론 한 번도 만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하다. 만지면 고통스러운 걸 체험했으니까.
나 역시, 딱히 생명에 큰 지장이 없으면 이런 '교육관'이다. 인간은 몸으로 배울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7.
헌데 하루는 '다리미는 만지면 아프니까 만지면 안 된다'라고 말하면 정. 말.로. 만지지 않는 부류다. 그 나이 때, 그러니까 만 2살 경이었을 때인데 하지 말란다고 말해서 정말 안 하면 이상한 법이라 그 점이 매우 걱정됐다.
어른들도 그렇듯 대개 큰 사고를 치는 넘들은 일단 술, 담배, 마약을 안 하고 둘째, 인간관계도 좋으면서 셋째, 겉으로 말끔한 녀석들이다. 무엇보다 살면서 규칙을 이상하게 잘 지키며 크는 녀석이 가장 무섭다(좋은 예: 히틀러).
대부분 이 바닥 사람(?)이 그렇듯,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나 후나, 육아나 아동 심리 서적을 잔뜩 읽은 나로서는 아이가 아이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건 위험신호라 판단했다.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당시 영유아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 중인 학교를 아내가 발견,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계속>
추신 : 영상은 최근 하루와 하나가 자기들끼리 몰래 찍어 놓은 영상. 한 달 만에 발견했다. 그리고 우리 폰에 그런 영상이 많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