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8가지를 모르고 한남동에 가면 섭섭하죠
지난 겨울, 한남동에 다녀왔다. 사운즈한남, 앤트러사이트, 디앤디파트먼트, 매거진B, 프라이탁 등 글로만 접했던 브랜드를 직접 보고 만지고 (돈을 쓰고) 느껴보면서 내가 찾은 키워드는 '편집'이었다. 새삼 '편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지 느꼈던 이 날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목적지는 사운즈한남. 사운즈한남은 도시형 복합문화공간으로 상점, 오피스, 갤러리, 주거공간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곳이다. 한남동 분위기와 꼭 맞게 설계된 아름다운 건축물과 그 안에 들어있는 브랜드에 매료되어 친구와 날잡고 찾아갔다. 올해 4월에 오픈하였으며, 매거진B를 만든 제이오에이치(JOH)에서 기획한 공간이다.
▲ 굉장히 큰 건축물인데 신기하게 빽빽하고 답답한 느낌이 없다. 이런 게 도시형 복합문화공간인가?
▲ 사운즈한남에서 만날 수 있는 브랜드
사운즈한남은 식당, 카페, 책, 문화공간 등 균형잡힌 브랜드를 소개하고 주거, 오피스공간까지 담아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한다. 의식주정에 집중해 온 제이오에이치(JOH)의 편집 방식을 알 수 있다. 사운즈한남의 제안으로 몰랐던 브랜드를 알게 되고, 이야기만 들었던 Aesop을 체험해보았다.
건축물 크기에 비해서 별로 볼 게 없네?
싶을 수 있지만 사운즈한남은 쇼핑센터가 아니라 복합문화공간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주거 공간과 오피스 공간을 포함한 공간이라 사운즈한남의 모든 공간을 엿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난 사실 조금 실망했거든..) 이걸 감안하고도 볼 거리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 건 아니다. 게다가 brunia flower는 문을 열지 않았고, phillips는 예약제에서 들어갈 수 없었으니까.
*사이트가 굉장히 심플하고 감각적이다. 요즘 유행(?)하는 스크롤 방식의 홈페이지. 우상단 햄버거 메뉴만 있고, 뎁스가 없다.
사운즈한남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 일호식에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슐랭 빕구르망 선정 식당일 정도로, 맛집이었다. 차분한 식당 분위기, 친절하고 목소리가 멋진 점원, 핸드폰 충전을 부탁한 걸 기억하고 있다가 자리가 나자마자 핸드폰 충전을 도와 준 점원의 서비스에 감탄했다. 음식도 정말 환상적이었다. 소고기 덮밥은 밥알 한 알 한 알을 버터로 코팅한 것 같았고, 꼬막은 조개무침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크고 쫄깃했다. 전체적으로 간이 세지 않고 심심하니 맛있고, 미역도 부드럽고 연해서 미역국을 안 먹는 내가 후룩후룩 잘도 먹었다. 오랜만에 현미밥을 먹으니 고소하니 씹는 맛이 있고, 닭갈비도 양념이 적절히 베어있어 너무 맛있었다. 아 그런데 음식 맛 칭찬하려고 하는 건 아니고,
*미슐랭 빕구르망 : 별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합리적인 가격에 훌륭한 맛을 제공하는 식당에 부여하는 등급
▲ 일호식 소고기덮밥, 닭갈비 정식
▲ 날 유혹한 미인 약주 프로모션
나는 원래 할인 프로모션, 세트 메뉴 구성에 넘어가지 않고 단품만 딱 먹고 마는 스타일이다. 식당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음식 맛이 좋아서인지, 이 날은 돈을 쓰겠다고 작정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일호식이 테이블 끝에 살짝 둔 넛지에 넘어갔다.
식당 분위기가 톤앤매너가 맞는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고, 인공 감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파주 유기농 찹쌀만으로 만든 건강한 술이라는 카피에 혹해서 45ml에 2500원이나 하는 술을 주문했다. 따듯한 술과 차가운 술의 차이점을 설명해주었고, 둘 다 맛보고 싶어서 한 잔씩 주문했다. 곧이어 점원은 술 병을 들고와 이 술이 어떤 술인지 설명해주었는데 그것 또한 좋았다. 술도 괜찮았지만 함께 제공된 서비스가 2500원 이상의 만족감을 주었다.
제이오에이치에서 만든 공간답게 매거진B가 배치되어있다. 매거진B가 벽 한 쪽을 꽉 채운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매거진B에 발걸음이 가게 되었다. 러쉬, 에어비앤비, 츠타야서점, 이케아 등 내가 잘 아는 브랜드도 있었지만 스타워즈, 모노클, 아우디처럼 내가 잘 모르는 브랜드를 소개한 호도 있었다. 어떤 브랜드인지 궁금해서 몇 장을 훑어보았다. 기본적으로 가치있는 브랜드여서 매거진B가 소개하는 것이겠지만, 어느새 나는 매거진B에게서 가치있는 브랜드를 하나 둘 씩 제안받고 있다. 가치있는 브랜드를 소개하는 매거진B 스스로도 가치있는 브랜드가 된 것도 감탄!
▲ 이건 매거진B의 매대일까, 매거진B가 소개하는 브랜드 매대일까?
사운즈한남 안 4층짜리 서점 스틸북스. 요즘 점점 소설, 에세이, 과학/기술 이런 식으로 책을 분류하는 게 아니라 주제별로, 테마별로 매대를 재구성하는 서점이 많아지는 것 같다. (남의 서재를 훔쳐보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책구경보다 책방 구경을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너무 기쁜 일!) 스틸북스도 그런 서점이다.
(사진은 없지만) 층마다 초입에는 스틸북스가 추천하는 책 코너가 있었다. 그리고 매대마다 스틸북스만의 카테고리가 있는데, 그래서 이 매대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얼마나 자주 바뀌는 지 모르겠지만 내가 간 날은 서울, 장소에 관한 매대가 구성되어 있었다. 을지로, 이태원, 부산 등 지역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한 곳에 있어서 잡지, 소설, 인터뷰지 등 장르 관계없이 살펴볼 수 있었다. 옆에는 서울 명소를 그린 일러스트 엽서나 소품들이 있었다.
▲ 서울의 이야기를 모아 둔 매대. 로컬 컨텐츠는 언제나 재밌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매대는 '차'에 관련된 책들을 진열해 둔 매대였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홍차 그림북을 보고 홍차를 끓여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위에 바로 티를 판매하고 있으니 얼마나 매력적인 편집인가. 차를 우리는 도구들도 어디서 셀렉해왔는지 정말 예뻤다. 그 뒤에는 Eat First, Think Later이라는 매대가 있었는데, 이 매대 위 제품 구성들도 야무지다.
▲ 내가 제일 좋아한 매대
다시 건축물 이야기로 돌아가는데, 스틸북스의 최애포인트는 햇빛이다. 건물 한 쪽이 유리로 되어있어 추운 날에도 햇빛이 그대로 책 위에 얹어지는데 그 햇빛 때문에 따듯하고 나른해서 계속 책을 보고 싶어졌다.
주말에는 4층에서 북토크, 강연 등 여러가지 프로그램도 하는 것 같았다. 스틸북스 인스타그램 링크도 남겨둔다.
사운즈한남을 구경하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앤트러사이트 한남점. 사실 이 건물을 그렇게 브랜드 꿀단지인 줄 모르고 갔다. 다 둘러보고 나서 알았지만, 앤트러사이트 건물은 디앤디파트먼트, 밀리미터밀리그램, 프라이탁, 포스트포에스틱 브랜드가 한 번에 다 있었던 곳이었다! 개인적으로 사운즈한남보다 이 건물이 정말 재밌었다.
앤트러사이트 한남점은 제주점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다. 제주점이 흙냄새 나는 창고같은 느낌이었다면 한남점은 힙한 느낌? 둘 다 카페 한 가운데 초록식물들이 가득하다는 점은 같았다. (그래서 창문에 습기가 마구마구 올라옴) 앤트러사이트는 1층부터 3층까지인데, 잠깐 구경만 하고 온다는 게 3층에서 빵굽는 냄새를 확 맡아버렸다. 그래서 마들렌을 두 개나 사먹었지. 이것도 넛지 맞지? 앤트러사이트도 엄청 좋았지만 다른 브랜드 얘기해야 하니까 요건 짧게 넘어간다.
생각노트의 글에서 접하고 기억했던 디앤디파트먼트!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다가 디앤디파트먼트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로컬 여행 가이드북을 보고 아하! 싶었다.
디앤디파트먼트는 일본에서 시작한 편집샵으로, 롱라이프 디자인을 추구하는 곳이다. 일본에만 8개의 지점이 있고 첫 해외지점이 바로 서울지점! 오래 쓸 수 있고 유행을 타지 않는 제품들, 그 지역의 특색을 살릴 수 있는 제품들만 고르고 골라 제안한다.
▲ 이 잡지를 보고 디앤디파트먼트구나! 하고 무릎을 탁 쳤다
일본의 지역 여행 가이드북. 보통 여행 가이드북은 매번 업데이트를 해야 하는데, 이 여행책은 업데이트를 하지 않아도 그 지역의 충분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한 가이드북이라 매년 잘 팔린다고 한다.
디앤디파트먼트 서울점은 한국스러운 제품들로 가득하다. 하얀색을 입힌 때타월. 버려지는 유리컵에 디앤디파트먼트가 새 메시지를 입힌 술잔들. 옛날 매직, 손톱깍이, 돌솥, 의자까지도 참 한국스럽다.
그리고 복순도가 막걸리를 만났지. 막걸리와 함께 복순도가 브랜드 스토리, 복순도가 영상을 보며 자연의 소리를 들었다. 마치 작은 브랜드 팝업스토어 같았다. 나는 막걸리 한 병을 샀다. 디앤디파트먼트가 나한테 제안하는 로컬 제품들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이런 편집샵 아주 좋아.
마지막으로 밀리미터밀리그램. 밀리미터밀리그램이 뭐지? 하다가 제품을 살펴보다가 학창시절 너무 좋아했던 mmmg라는 걸 깨달았다. 문구류에서 더 확장되어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는 편집샵이 되었지만, mmmg 디자인 감성이 고스란히 묻어있어서 다이어리만 봐도 mmmg라는 걸 알 수 있더라. (그리고 난 집에와서 mmmg 다이어리를 주문했지..)
다이어리, 카드 뿐 아니라 그릇, 컵, 도자기 제품까지. 디앤디파트먼트와는 또다른 감성의 편집샵이다.
제품이 쏟아질수록 편집의 힘이 커진다. 물건을 하나하나 다 들여다볼 수 없으니 괜찮은 안목을 가진 사람이 골라둔 걸 보고 싶어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남동에서 나는 하루 종일 편집된 걸 제안받았다. 사운즈한남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고, 매거진B가 가치있는 브랜드를 소개하고, 스틸북스가 서울을 테마로 매대를 가꾸고, 일호식이 약주를 살짝 끼어넣고, 디앤디파트먼트가 평소에 쉽게 지나친 물건들을 재해석하고, 막걸리 브랜드를 추천하고, mmmg가 문구와 함께 소품들을 보여주었던 것 모두 다 '편집'이었다. 얼마나 편집을 잘 하느냐에 따라 지갑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고(?)
내 관점으로 물건을 셀렉하고 컨셉을 잡고 재해석해서 제안하는 능력. 편집의 힘을 느꼈던 하루. 나는 뭘 편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