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른환경 06화

이혼도장과 양육비

by 김커피

중학교 3학년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시험을 잘 보고 개운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다가 골목 앞 작은 식당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와 누군가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나 오늘 시험 잘 봤는데! 나도 맛있는 거 먹을래! 철부지 같은 말을 하면서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데 엄마 옆에 앉은 사람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았다. 아빠였다.

아빠를 인지하고 나서부턴 왠지 모르게 그 공간이, 공기가 어색해졌다. 별다른 말도 없이 나를 물끄러미 보고만 있던 아빠라는 사람.


어색한 마음에 말을 못 하고 가만히 앉아 남아있는 음식을 집어먹고 있는데 어른들의 용건은 내가 오기 전에 이미 끝난 것 같았다. 곧 그 자리에서 먹은 것들의 계산이 이루어지더니 뜬금없이 노래방엘 갔다.


동네 단골 노래방에 앉은 어른들은 과일안주에 맥주 한잔씩을 했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나는 열심히 노래했다. 사실 노래 부를 기분은 아니었는데 당시의 분위기가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들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광대라도 된 것처럼 쉴 새 없이 몇 곡 연이어 부르다 보니 목이 말랐다. 수분충전을 위해 과일을 먹느라고 앉아있는 내 옆으로 다가온 아빠는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듣던 대로 노래 참 잘하네. 내가 손 한 번만 잡아봐도 될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빠는 내 손을 잡았다. 손이 따뜻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어떤 감동도 없었다. 너무 어릴 적에 떠나버린 친아빠와의 재회 시간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렇게 단 두 시간 정도의 짧은 만남이 있고 다시금 이별은 뜨뜻미지근했다. 내가 10년 만에 만난 아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건넨 한 마디는 "안녕히 가세요."였다.


다음날 들어보니 아빠는 역시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말하러 온 거였다. 긴 시간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와 아빠는 별거 상태로 존재해도 엄연한 가족이었는데. 하지만 도장을 찍은 그날 이후 나에게 여태 없었던 아빠는 정말로 없어졌다.



사춘기 나이였던 나는 티 한번 내지 않고 그 시간을 아무렇지 않은 듯 보내던 중이었다. 하루는 실과 바늘을 찾으려고 할머니의 반짇고리함을 열었다가 접혀있는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뭔가 싶어 종이를 펼쳐서 삐뚤빼뚤 못난 글씨로 쓰인 내용을 읽어보니 필체의 주인공은 아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장까지 찍혀있는 계약서 같은 것. 나에 관한 내용이었다.


원래 어른들 일에 대해 묻지도 않고 알아도 모르는 체 넘기던 나는 그것만큼은 참지 못하고 할머니께 물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빠는 매달 양육비 얼마씩을 보태기로 해놓고 단 한 번도 보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혼도장 찍기 바빠서 양육비를 주겠다는 약속의 종이에 지장까지 찍어놓고 지킨 적이 한 번도 없다니. 중학생인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서류상으로 우리와 찢어졌으니 그만인 거였다.



그리고 얼마 후 학교에 낼 서류 때문에 동사무소에 호적등본을 떼러 갔을 때, 아빠 이름 아래에 내 이름이 있고 또 다른 아이들의 이름이 있는 걸 보게 됐다. 내가 어리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빠의 아이들이라는 것을. 아빠는 우리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고 그 사이에서 내가 아닌 다른 아이들을 낳았던 것이다. 둘도 아니고 셋씩이나. 나 하나도 지키지 못한 사람이... 그때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아빠는 욕심쟁이었다. 엄마와 헤어지고 난 후의 일이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실, 문제가 있었다.


내가 서른여덟이나 먹은 올해에야 알았지만 아빠에겐 상간녀가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가 생겨서 엄마와 헤어진 거라고 했다. 엄마는 그런 아빠가 너무 밉고 괘씸해서 이혼 도장을 찍어주지 않고 별거 상태를 유지했다고 한다. 엄마와 나를 책임지지도 못했으면서 바람을 피우고 내가 중3이 되었을 때야 찾아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사람. 나의 아빠.



한 번씩 그날을 돌아본다.

그래도 아빠라면 나한테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린 나이에 아빠와 떨어져서 어색해하는 내가 "아빠"하고 한 번을 불러보지 못하고 있는데. 어른이니까 나보다 용기를 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지금 아빠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딘가에 살아는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난 아빠를 좋아하기는커녕 그리워할 수도 없는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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