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로 내려온 나는 백수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8년 동안 매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7시에 출근했던 지극히 아침형에 맞춰진 습관 때문에 처음에는 늦잠 자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다음 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신경 쓸 일도 없이 맛있는 커피를 하루에 몇 잔씩도 마시고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최선을 다해 놀았더니 그런 습관쯤이야 금세 무시하는 몸이 되었다.
백수의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매일 아무것도 안 하는데 시간은 급하기만 했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10개월이 지나가 버렸고 내 통장의 잔고도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6개월 정도만 쉬고 싶었다. 얼마나 쉬고 싶다는 기한을 정해놓은 건 내 욕심이었을까. 딱 그만큼을 쉬고 다시 일할 곳들을 찾아보는데 맘처럼 쉽지가 않았다. 날마다 불안한 마음으로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생각하며 4개월을 더 흘려보냈고 백수 10개월 차에 갑자기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시간처럼, 줄어드는 통장의 잔고처럼 여기 이곳에서 홀연히 사라지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들자마자 항공권과 숙소만 예약한 나는 느닷없이 오사카로 떠났다.
어딘가로부터 동떨어진 느낌으로 오롯이 혼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원하던 대로 오사카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제2외국어로 일본어 수업을 들었지만 졸업한 지가 10년이 넘은 내가 알아듣는 말이라고는 기본 중의 기본인 단어들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좋았다. 말이라는 게 넘쳐서 지치는 세상살이. 들을 수 없는 말이라 들을 필요가 없었던 말들은 마치 음악 같았다. 이어폰도 필요 없이 오사카 자체 BGM을 들으며 걷고 또 걸었다.
무작정 떠났지만 술의 나라 일본, 맛의 도시 오사카에서 꼭 하고 싶었던 것은 역시 술쟁이답게도 '바깥 혼술'이었다. 그때까지도 집에서야 혼자 술을 마시는 일이 허다했지만 밖에서 혼자 술을 마신 적은 없었다. 비로소 나의 바깥 혼술 데뷔전인가!
숙소에서 15분 거리의 도톤보리에서 데뷔전을 치를(?) 가게를 물색했다. 나의 모든 촉수를 세워 성의껏.
번화가를 벗어나 골목길로 들어가니 일본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작은 신사가 보였다. 그 신사의 이름은 ‘호젠지’였고 골목길은 ‘호젠지 요코초’라고 불렸다. 좁은 골목길이 이어지는 그곳에는 작은 술집이 즐비했다. 해가 빨리 지는 계절의 저녁 시간이라 상점은 다 비슷해 보였는데 그중 내 눈과 마음에 확 들어오는 곳이 있었다.
바깥에서 가게 안을 살짝 봤더니 사람이 많아 보여서 고민됐지만, 남아 있는 자리마저 뺏길까 봐 얼른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입구에 걸어둔 작은 포렴을 살포시 들고 나무 문을 옆으로 밀었는데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부터 정감이 갔다.
문 앞에 서서 바로 보이는 건 카운터석과 그 앞의 주방. 나는 혼자라 카운터석의 남은 자리로 앉았다. 협소한 공간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사람들 사이 정중앙에 앉고 나니 주방이 내 앞으로 와이드로 펼쳐져 보였고 주방장의 얼굴이 잘 보였다. 마치 드라마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메뉴판을 찬찬히 살펴보니 작은 사이즈로 나오는 안주는 대부분이 300엔 정도로 저렴했다.
“스미마셍! 코레오 쿠다사이.”
나는 할 줄 아는 말과 할 수밖에 없는 손짓으로 메뉴판의 두 가지 안주와 생맥주를 가리키며 주문을 하고 기다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오늘 나 조금 멋진데? 생각하는 찰나, 주방장은 기본 안주와 생맥주를 내게 건넸다. 생맥주를 받아 들고 눈이 뒤집힐 뻔했다. 우리가 보통 호프집에서 주문하면 나오는 500ml의 맥주잔보다 훨씬 큰 잔에 가득 찬 맥주는 하얀 거품이 파도의 거품처럼 넘실거렸다. 받아 들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을 맥주잔에 갖다 댔다. 넘쳐흐르는 것도 아까운 맥주였으니까. 진짜 ‘술’ 같은 술맛이었다. 행복했다. 행복의 맥주와 같이 나온 기본 안주는 삶은 완두콩이었는데 포슬포슬한 콩을 하나씩 까먹는 재미가 있었다.
이윽고 내가 주문한 두 가지의 메뉴도 나왔다. 주방장과 카운터석에 앉은 손님의 자리는 거리가 조금 있었는데 음식이 준비되면 주방장은 기다란 나무 주걱 같은 데다 안주를 얹어 손님에게 내밀었고, 손님은 그 안주를 받아 들어 테이블에 놓으면 됐다. 내가 그렇게 받아 든 안주는 모둠회와 가리비 버터구이였다.
모둠회는 몇 가지의 회를 조금씩 썰어 간장과 고추냉이를 따로 세팅한 나무 그릇에, 가리비 버터구이는 껍데기의 윗부분을 오픈하고 구운 채 접시에 올려 주었다. 먼저 보기에도 신선한 회를 한 점 먹고, 맥주를 마시고. 버터 향이 솔솔 나는 촉촉하게 구워진 가리비를 한 점 먹고, 맥주를 또 마시고. ‘이걸 어떻게 다 마시나’ 크기의 잔에 담긴 맥주는 ‘이걸 그렇게 다 마시네’ 할 만큼 금방 줄어들었다. 그렇지만제게는 아직 메인 안주와 기본 안주가 남아 있습니다. 생맥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행복하다."
그 순간의 기분을 담아낸 짧은 단어로 중얼거리는 입가엔 미소가 절로 만들어졌다. 줄곧 나를 괴롭히던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 따위는 적어도 그 순간에는 볼 수 없었다.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내가 자리 잡을 곳 하나 없겠어.’ 막말했던 내가 막막했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을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쓸어내렸다.
동시에 내 한숨도 쓸어내렸다. 다 잘 될 거야 주문을 걸면서.
이렇게 나의 바깥 혼술 데뷔가 이루어졌다. 나를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완전한 이방인이 되어 보냈던 그 시간은 지금의 나를 이루어냈다. 무턱대고 시작했지만 용감했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현실이라는 것은 지레 겁부터 먹게 만든다. 그럴 땐 잠시 훌훌 버리고 떠나 나에게 좋아하는 무언가를 먹게 만드세요.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다른 마음을 먹게 만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