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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피 Apr 17. 2024

퇴사자가 마주한 삶은 계란

찜질방 계란과 식혜

서울에서 다니던 직장에서 퇴사하고 본가로 내려오기 위한 준비를 하던 기간이었다. 퇴사 후 일주일 동안의 시간 동안 빠듯하게 집이며 주변이며 모든 걸 정리해야 했다. 캐리어에 싸 들고 갈 최소한의 짐만 빼고 모든 이삿짐을 싸서 택배 접수를 하고 청소를 하고 나니 내가 둘러쓴 먼지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나는 먼지가 되어 책 한 권과 목욕 바구니를 챙겨 동네 찜질방으로 향했다.


찜질방은 평일인 데다가 한낮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중목욕탕은 어쩐지 매번 어색하고 민망했는데 조용한 사우나 안에 들어가 뜨끈한 물에 몸을 한참 담갔다가 씻고 나오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깨끗해지고 따뜻해지니 몸이 나른해져서 찜질복을 입고 찜질방 안으로 들어가 일단 누웠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아무 곳에나 드러누워 있으니 행복했다. 잠깐 행복감을 누리며 졸다시피 했더니 허기가 느껴졌고 나는 당장 일어나서 밝은 조명에 알록달록한 메뉴판이 붙어 있는 찜질방 매점으로 갔다.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맥반석 계란이었다. 역시 찜질방은 계란인가! 살펴보니 삶은 계란이 없어 보였다. 구운 계란보다 삶은 계란을 좋아하는 나는 언젠가부터 찜질방에서 직접 삶아 쌓아 놓은 삶은 계란이 사라지고 계란판에 상호 스티커가 붙은 구운 계란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매점을 지키고 계신 분께 여쭤보았다.


“이모. 혹시 삶은 계란은 없어요?”


매점 이모는 대답하셨다.


“우리 삶은 계란은 안 파는데... 혹시 기다릴 수 있어요? 내가 삶아줄 게 바로.”


아... 그 말은 어떤 고백의 말보다 위력이 있었다. 더불어 내 위를 자극하는 힘까지 있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번거롭게 해서 죄송하고 감사하다며 인사를 드리고 계란과 식혜 값을 지불한 뒤 매점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계란이랑 식혜 나왔어요~오~”


기쁜 부름에 나는 총총 달려가 쟁반을 받아 들고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 계란은 갓 삶아서 껍질을 까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다. 그 온도가 너무 좋았다. ‘앗 뜨거워 앗 뜨’를 연발하며 껍질 하나를 다 깐 계란을 호호 불며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과장이 아니라 내가 살면서 먹은 계란 중 제일 맛있는 계란이었다. 완숙과 반숙 사이, 건강한 빛깔을 띠고 있는 노른자가 예쁘기도 예뻤다. 입에 있는 계란을 다 씹어 넘기기도 전에 또다시 남은 계란을 입에 쏙 넣었다. 이때가 식혜 타이밍이다. 작은 입 안 가득 계란이 있고 목이 메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 목구멍으로 식혜를 투입한다. 한 모금 두 모금 들어갈 때마다 “이거지 이거!” 감탄이 절로 나오는 조합이다.


식혜는 많은 양이라 한 번에 먹을 수가 없어 챙겨간 책을 읽으며 천천히 마셨다. 그때 읽고 있던 책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었다. 엊그제 퇴사를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해야 했던 나이라 집어 든 책도 하필이면 그 책이었나 싶다.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을 읽으며 마지막 남은 삶은 계란을 통째 입에 넣식혜를 쭉 들이킬 때 문득 노래 한 곡이 떠올랐다. 대중가요 중에 삶은 계란을 제목으로 한 노래였는데, 그 노래를 가만히 들어보면 계란에 비유한 삶이란 퍽퍽하고 목메는 그런 답답한 느낌이 강했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 네 인생은 네가 만들어 가야 한다는 내용의 노랫말은 평일 한낮의 찜질방에서 다 먹은 계란 껍데기가 담긴 접시와 반쯤 남은 식혜 통을 마주하고 앉은 퇴사자에게는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바라는 바에 대해 생각했다.


삶이 계란 같다면 앞으로의 내 삶은 오늘 내가 먹은 이 계란 같기를. 그렇게 뜨겁고, 인정이 넘치기를. 목이 멜 듯하면 식혜 같은 친구를 만나 그 답답함을 꿀꺽 삼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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