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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피 May 01. 2024

엄마와 시장칼국수

모녀의 먹텔레파시

"니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옛날 어른들이 말 안 듣는 아이에게 우스갯소리로 하는 어딘지 모르게 잔인한 이 단골 멘트를 나도 몇 번 들은 적 있다.


"그럼 그 다리가 무슨 동에 있는 다린데?"


예상치 못한 나의 침착한 반응과 본질을 꿰뚫는 질문에 엄마가 대충 둘러대지만 않았다면 그 말을 거의 믿을 뻔도 했다. 왜냐? 엄마와 나는 얼굴도, 체질도, 성격도 아무리 봐도 닮거나 통하는 구석 하나 없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그런 엄마와 내가 유일하게 통하는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먹텔레파시'다. 30대가 되어서야 제대로 동거를 시작한 엄마와 내가 우연한 계기로 이게 통하는 건가 생각이 든 후부터 수차례 경험을 통해 이것만큼은 엄마와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까지 비장할 일도 아니지만 내가 엄마의 딸임을 증명하는 우리 가족 나름의 이슈였다.


무엇이든 의견 한번 맞아본 적이 없는 나와 엄마에게 한 번씩 런 날이 있다. 밥상에 자주 올라오지 않는 메뉴인 계란찜을 먹고 싶은 날이면 엄마는 "오늘 계란찜 할까?" 묻고, 외식을 자주 하지 않는 편인데 갑자기 국밥이 당기는 날이면 엄마가 "돼지국밥 먹으러 갈까?" 하고 물었다. 뭐 우연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우연은 꽤 자주 일어났다.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우연 중에서도 특히나 잘 맞아떨어지던 메뉴가 시장 칼국수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동네 사람들이나 갈 법한 소규모 시장이 하나 있는데 그곳은 떡볶이와 김밥, 족발 등 포장 위주의 장사를 하는 유명한 맛집이 많아서 갈 때마다 붐비는 곳이다. 먹거리들이 넘쳐나지만 그 시장을 가는 사람들 중에서는 안 먹어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메뉴는 단연 칼국수다.


작은 시장 한쪽에 더 작게 칼국수 촌이 형성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서 먹고 갈 수 있게끔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칼국수 집들이 각자의 이름을 내걸고 모여 있다. 그중에서도 시장의 이름과 똑같은 칼국수 집이 하나 있는데 안쪽 자리에서 3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장사를 하고 있는 나의 단골집이다.


시장 안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설 때부터 육수를 담은 솥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볼 수 있다. 뜨거운 김을 볼 때 이미 콧 속으로 육수의 향이 들어온다.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걸터앉으면 "어서 오이소. 뭘로 드릴꼬?" 주인장 이모님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온다. 엄마와 나는 동시에 "칼국수 2개요." 외친다.

여기서는 우리 모녀도 이심전심이다.


미리 만들어 둔 반죽을 큼직하게 떼어내서 제면기로 넣으면 반죽이 얇게 펴져 칼국수 면으로 나온다. 그렇게 뽑은 면은 끓는 물이 든 첫 번째 솥에 넣어 한번 삶긴 뒤 육수가 든 두 번째 솥에서 한번 더 삶긴다. 스댕 그릇이라 불리는 정겨운 쇠그릇에 칼국수가 안착을 하면 주인장께서 위에다 양념장과 김가루, 후추 등을 올리고 우리에게 완벽한 시장 칼국수의 모양으로 내어진다. 거기다 다진 땡고추가 담긴 통을 들고 땡고추 고명을 올리는 것까지 해야 엄마와 나의 칼국수 먹을 준비가 끝난다.


생수 페트병에 준비된 보리차 물을 한 모금 먼저 마시고 입을 헹군 뒤 칼국수의 육수를 숟가락으로 두세 번쯤 퍼 먹는다. 크으~ 하는 감탄사를 시작으로 쉬지 않고 칼국수를 후루룩 입에 넣으면서 중간중간 주인장 이모님의 손맛이 담긴 깍두기를 아삭아삭 야무지게 씹어 먹는다. 인심도 얼마나 좋으신지 그릇 가득 칼국수를 주시면서 깍두기가 몇 알만 남아 있어도 얼른 국자로 깍두기를 떠서 리필해 주신다. 그렇게 앉아있는 손님 모두의 깍두기 그릇을 신경 쓰시면서 "이리 오이소~" 칼국수 촌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향한 인사도 빼먹지 않으신다. 진정 프로다.


엄마는 칼국수를 먹으러 다닌 지가 얼마나 오래됐는데, 우리가 여기 시장에서 먹은 칼국수만 해도 몇 그릇인데 아직도 먹을 때마다 "오늘은 칼국수가 더 맛있는 거 같노?" 하고 말한다. 나도 엄마가 그럴 때마다 부정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는데 우리는 그게 그 자체로 웃겨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서로를 보며 빵 터진다. 그렇게 웃을 때면 엄마의 얼굴을 보고 한 번씩 놀라곤 하는데, 거울로 비치는 나이 들어가는 내 모습과 엄마의 모습이 닮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 딸이 확실하구나! 칼국수를 먹는 자리에서 이미 아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렇듯 칼국수를 먹으러 가는 날에는 엄마와 나 사이에 닮음이 있고, 평화가 있다. 내 마음을 감지하는 초감각적 능력을 가진 엄마와의 그 평화를 오래도록 지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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