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못 먹는 사람의 슬픔
40년 가까이 싫은 맛
나는 편식이 심하다. 냄새나 식감에 민감한 편이라 못 먹는 음식이 꽤 많다. 손가락 열 개 정도는 거뜬하게 꼽을 정도로 못 먹거나 안 먹는 것들이 있지만, 내 기억이 최대한으로 닿는 어린 시절까지 돌아보면 지금까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먹을 것'은 오이다.
"바보 아이가."
살면서 먹는 것 때문에 엄마한테 제일 많이 들은 말이다. 주로 그 대상은 오이였다. 내가 오이를 못 먹는 걸 알면서도 엄마는 매번 나더러 바보라고 놀렸다. 여름철이면 특히나 그랬다.
"이렇게 더울 때는 밥맛도 없고 오이냉국이나 들고 마시면 최곤데."
"이렇게 더울 때는 다른 반찬도 필요 없고 오이소박이나 먹으면 최곤데."
일 년에 꼭 한 번씩 찾아오는 여름철에 이런 말을 꼭 한 번씩 듣는 나는 누누이 엄마에게 말한다.
"내 신경 쓰지 말고 엄마 먹고 싶으면 해 먹으라니까."
그러면 또 엄마는 애잔한 눈빛을 하고서
"아이다. 니 안 먹는데 뭐 하러."
엄마는 항상 이런 식이다. 밥상의 기준이 당신이 아니라 나로 정해져 있어 괜히 죄책감까지 들게 한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러 번 시험해 본 결과 나는 체질적으로 오이가 안 맞는 거였고 그래서 지속적으로 못 먹는 거였다. 내일모레가 마흔인데 여전히 오이를 못 먹는다.
못 먹는 사람의 슬픔은 못 먹어봐야지만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생 오이를 간식처럼 씹어먹을 때 그 신선함이 전해져서 나도 먹고 싶어 지는데 먹을 수가 없어서 생 당근으로 대신한다. 친구들은 피자를 먹을 때 느끼한 맛을 잡아주기 위해 피클을 먹는데 나는 먹을 수가 없어서 콜라만 마셔댄다.
냉면이나 밀면, 막국수를 먹으러 가서도 "사장님 죄송한데 하나는 오이 좀 빼주세요." 하고 부탁드려야 한다. 딱히 죄송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못 먹는 것이 내 평생의 죄인 것처럼 많은 사장님들께 수백 번을 죄송해왔다. 어쩌다 바쁘셨던 사장님의 실수로 오이가 들어간 채로 음식이 나오는 경우에는 울상인 내 얼굴을 보고 앗차 싶어 "아 오이 빼 달라고 하셨죠. 죄송해요. 다시 해드릴게요!" 하시는데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이 한 그릇이 얼마나 아까운지에 대한 생각이 그 찰나에도 들어서 "아니에요. 제가 그냥 빼먹을게요." 하고 그릇을 앞에 두고 열심히 오이를 건져낸다.
그나마 1인당 한 그릇씩 먹는 메뉴라면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오이를 빼서 먹는 수고만 하면 되는데 같이 먹는 메뉴, 예를 들어 특대자의 물회 같은 것을 먹을 때면 나 빼고는 다 오이를 좋아하는데 나 하나 때문에 오이를 빼고 먹게 되는 일행들에게 미안해져서 오이를 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빼면 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못 먹는 사람은 이렇게나 여러모로 죄인이거나 진상이 되는 기분을 느낀다.
오이를 건져낸 젓가락에 남은 약간의 향에도 거부감이 드는 나는 최근 얼떨결에 오이를 허용한 적이 있다. 먹으러 가는 식당이 아니라 사우나를 하러 간 찜질방에서였다.
남들은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가거나 쇼핑을 하지만 나는 사우나를 하러 가서 세신을 받기 시작했다. 세신이란 전문용어로 '때밀이'를 말한다.
뜨끈한 탕에서 몸을 먼저 녹이고 있다가 세신사 선생님의 부름에 쪼르르 가서 사우나 베드에 누웠는데, 눕고 나니 뜨거운 물이 흥건한 수건을 몸 전체에 덮어주시고 얼굴 마사지부터 해주셨다. 처음에는 크림 같은 느낌의 무언가를 발라주셨는데 그다음 단계가 문제였다. 먼저 바른 그것을 닦아낸 후 얼굴에다 다른 것을 얹는데 그때 나의 후각은 믿을 수 없는 냄새를 만났다. 오이였다. 나는 오이 마사지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겨우겨우 입으로만 숨을 쉬는데 그래도 조금씩 비집고 들어오는 오이향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얼굴에 오이를 얹은 채로 한 시간 가까이 세신을 받았다. 내가 살면서 오이향을 가장 길게 허용한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등산을 가서 느닷없이 입질이 오는 대소변을 참는 것만큼 힘들었지만 막상 오이 마사지를 받고 나니 그 순간뿐일지라도 얼굴이 뽀송해진 것 같아서 좋기도 했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다.
그간 나는 내가 좋아하는 맛에 대해서만 떠올려왔다. 점점 가까워져 오는 마흔의 삶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사람이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사실에 대해 절실하게 느끼는 중에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도 떠올려보다가 결국 최고로 싫어하는 오이에 대해서까지 글로 남기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추억도 싫어하는 것에 대한 기억도 전부가 내 삶의 일부니까. 좋은 것도, 싫은 것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