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오후였다.
커피 냄새가 좋아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가야겠다며 한 여성분이 들어오셨다.
달달한 바닐라라테를 주문하시고 앉아계신 손님의 눈빛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 허전함을 조금이라도 채워드려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들어서 정성껏 원두를 탬핑하고 스팀을 쳤다. 라테에다 작은 하트도 그려서 내드렸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따뜻한 커피를 두 모금쯤 드시고 가만히 커피잔만 응시하던 손님은 내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 결혼하려면 아직 멀었죠?"
글 여기저기에 수시로 언급되는데 내일모레마흔인 나는 갔어도 이미 갔어야 했겠지만 실제나이보다는 동안인 이유로 당연하다는 듯 이런 소릴 듣는다. 어쨌거나 가타부타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네- 하며 작게 고갤 끄덕였다.
"보니까 혼자 가게 운영도 하고 능력 있는 것 같은데 웬만하면 결혼하지 마요. 연애만 해."
이렇게 말씀하시던 손님은 당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수도꼭지를 세게 틀어서 콸콸 흘러나오는 물처럼 손님의 입에서 콸콸 말이 흘러나왔다.
손님은 두 번의 결혼을 했고, 두 번을 다 후회한다고 하셨다.
첫 남편은 진부한 말로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사람처럼 굴더니 결혼을 하고 나서 돌변했다고 한다. 도박에 눈이 멀어 아내가 모은 돈을 탕진해 버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매일 식당 일을 하며 받아오는 일급을 뺏어갔다고. 뺏기지 않으려고 용을 썼더니 그때부턴 폭력이 시작됐다고 했다. 거의 매일을 맞고 살면서 아이들까지 키우려고 하니 힘들어서 참다못해 도망을 나왔다고 하셨다.
어렵사리 도망을 나와 이리저리 용역으로 돌아다니며 일을 하다가 또 한 남자를 만났고,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혼인신고 없이 함께 살고 계시는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믿었던 그 사람이 바람을 폈다고.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을. 서류상으론 남남이니 부부관계에 법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있다고 하셨다.
담담하게 '그냥 살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이 처음 봤던 멍한 눈빛에서 보였던 허전함과 같이 느껴졌다. 당신이 결혼했던 남자들은 나르시시스트였다고, 주제도 모르고 자기애만 강해서 아내인 당신을 무시하곤 했다고. 살아보니 진실한 남자가 없고 다 똑같다고 했다.
다소 극단적인 말이긴 하지만 나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다만 진심으로 들었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의원을 갔을 때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
한의원에는 어머님들, 할머님들이 자주 오셔서 한의사와 물리치료사에게 속내를 털어놓곤 한다고. 그렇게 공감하며 들어주는 것이 침 맞고 찜질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드는 건지 몸이 딱히 아프지 않아도 자주 오신다고. 그 이야길 들으며 "선생님들 프로 리스너가 되셨네요. 그러기도 쉽지 않을 텐데 대단하세요." 하고 말했었던 기억이 났다.
나 역시 리스너가 됨으로써 손님의 답답하고 아픈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좋을 것 같았다. 아마 한의원에 계셨던 선생님들도 그런 마음이었겠지?
손님은 한 시간 동안 나와 대화를 나누고 나가실 땐 들어오실 때와 다르게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하셨다.
위하는 마음이 진심일 때, 그 마음은 긍정으로 통하는 것 같다. 커피 한잔을 하는 잠시나마 그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리스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