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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박과 객기가 난무하는 육아

엄마도 너랑 놀기만 했으면 좋겠어

by 김다다

어느 날 저녁 나와 아들의 대화.

"너 이 오이 다 먹어야 해. 안 먹으면 변비 걸려."

"왜 먹어야 해?"

"밥 먹을 때 채소 하나도 안 먹었으니까 오이라도 먹아야 돼. 너는 김치도 안 먹잖아."

"김치 먹을래."

"진짜? 열 번 먹어야 돼."

"열 번 먹을래."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남편이 우리를 중재했다.

"엄마는 협박하지 말고, 아들은 객기 부리지 말고."


일곱 살 아들은 비위가 약한 편이라 발효식품인 김치를 못 먹는다. 빨간 김치는 매워서 못 먹기도 하지만 백김치도 특유의 발효식품 냄새 때문에 싫어한다. 먹으면 구역질을 하는 정도. 그래서 매일 저녁 방울토마토 한 사발이나 오이 한 개를 먹이고 있다. 생채소는 대체로 잘 먹는데, 이 날따라 잘 안 먹어서 엄마인 나는 협박을 했던 거였고, 그 협박에 대응해서 아이는 객기를 부리는 거였다.


지난 일요일에는 남편이 아팠다. 어린이날과 대체 휴일에 남편은 출근을 했다. 근 사흘 동안을 나와 아이가 오롯이 보냈다. 일요일에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극장에서 영화 <마인크래프트> 더빙판을 보았다. 어린이날에는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가서 하루 종일 놀았다. 대체 휴일에는 서울랜드에 가서 또 하루 종일 놀았다. 서울랜드에서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는 ○○랑 놀아서 너무 재밌었어. 매일매일 이렇게 놀고 싶어."


엄마는 늘 '의무'를 담당한다.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준비시키고 학습도 봐주고. 평일에 엄마와 하는 놀이는 겨우 책 읽기나 보드게임 정도가 끝이다. 아빠는 대체로 '여가'를 담당한다. 아빠와 아들, 둘이서는 매일 싸움놀이에 공룡놀이 종이 접기까지 매일매일 노는 것만 한다. 그러다 보니 엄마인 나는 언젠가부터 아이와 있는 시간이 즐겁지가 않았다.


의도치 않은 아빠의 부재 덕분에 며칠 동안 아이와 좀 놀았다. 아이에게 매일 습관적으로 협박을 일삼으면서, 해야 되는 일들을 하도록 하면서, 그렇게만 시간을 보냈었는데, 놀기만 하니 참 좋더라. 극장에 가는 길에 아이의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함께 걷는데 그제야 아직도 아이 손이 너무 작은 게 느껴졌다. 이 조막만 한 손을 가진 아이하고 나는 매일 뭐 하고 있었던 거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극장에 앉아서 영화 시작 전 영화 예고편을 보는데 한참을 조용히 하고 있던 아이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게 마인크래프트야?"

"아니야, 저건 다른 영화 예고편이야. 조금만 기다리면 마인크래프트 시작할 거야."

예고편과 본 영화도 아직 구분 못하는, 그런데도 꾹 참고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묻는, 이런 아이한테 나는 왜 그렇게 매일 다그쳤던 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아이랑 놀기만 했으면 좋겠다. 아이랑 놀고 있으면 누가 식사를 차려주고 빨래도 청소도 해주고. 나는 아이에게 좋은 말만 해주고. 밥을 억지로 몇 숟가락 더 먹게 하는 일이나 양치를 시키는 일, 씻기는 일, 자기 싫다는데 재우는 일 같은 건 누가 해 줬으면 좋겠다. 아이랑 조각조각 색종이를 마음대로 자르며 온 거실을 어지럽히면서 놀고 나면 누가 작은 조각까지 깔끔하게 청소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종종 남편에게 '당신이 아이랑 노는 걸 뒷바라지한다'라고 말한다. 나는 뒷바라지를 하고, 뒷바라지만 할수록 아이는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한다. 가뜩이나 아들이라 나는 몸으로 놀아주는 데 달려서 아이는 저녁마다 아빠를 오매불망 기다리곤 한다. 그런 부분에서 질투나 허탈감 같은 건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휴일 내내 조막만 한 손을 잡고 놀러 다니고 나니까 내가 이 소중한 세월 속에서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놀아야겠다. 아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조금 더 길게 들어주어야겠다. 조막만 한 손을 잡고 조금 더 많이 볕을 쬐어야겠다. 숨이 차도록 뛰어가는 아이의 뒤꽁무니를 조금 더 기쁜 마음으로 오래도록 따라가야겠다. 아마도 이런 날들이 앞으로 채 오 년도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문득 아이와 함께하는 매일이 사무치게 아깝다.


output_3596188562.jpg 영화 보고 집와서 아이가 그려서 만들어 쓴, 마인크래프트 캐릭터 '피글린'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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