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아줌마들처럼 꽃과 풀과 나무가 좋아져 버렸다
혹시 당신은 산과 들과 강과 바다가 뭐가 좋은지 모르는가?
부럽다.
산과 들과 강과 바다가 좋은 줄 모르고 사는 그 젊음이.
나 또한 예전에는 산과 들과 강과 바다가 뭐가 좋은 지 몰랐다. 산과 들과 강과 바다에서는 무언가 액티비티를 해야만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산은 타야 제맛이고, 산을 타고나서는 특색 있는 안주에 막걸리를 마셔야 했다. 들에서는 자동차를 닮은 독특한 탈거리를 타고 달려야 했다. 강에서는 배 따위를 타고 흘러가며 인공적인 구경거리를 봐야 재밌었다. 바다에서는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들여다봐야 재미가 있었다. 그때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것으로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도 여느 아줌마들처럼 산과 들과 강과 바다가 좋다. 꽃과 풀과 나무가 좋아져 버렸다.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학교 캠퍼스에는 시뻘건 철쭉이 한가득 심겨 있었다. 봄이 되면 마치 불을 붙여 놓은 것처럼 캠퍼스 곳곳 이 시뻘겠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빨간색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굳이 철쭉을 봐야 한다면 진분홍색이나 흰색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 시뻘건 철쭉은 쓰디쓴 대학원 생활과 함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올해부터 시뻘건 철쭉이 너무 좋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 피어난 우렁찬 철쭉들이 너무 좋다. 집 근처 공원에도 시뻘건 철쭉이 곳곳에 있는데, 그 시끄럽고도 선명한 색상이 이쁘고 또 이쁘다. 곁에 있는 다른 진분홍색이나 흰색 철쭉보다 단연코 시뻘건 철쭉이 좋다.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뙤얕볕 아래 당당히 무리 지어 피어있는 철쭉을 보면 그 생명력에 눈길을 뗄 수가 없다.
작년까지만 해도 철쭉에 관심이 없었는데. 빨간 꽃 따위야 그저 쓱 보고 지나쳤을 뿐인데. 올해 봄에는 유달리 시뻘건 철쭉이 당긴다. 나도 드디어 그 나이가 된 것이다. 한참 시뻘건 철쭉이 이쁘게 보일 나이. 여느 아줌마들처럼 이제 나도 화려하고 정확하고 과감한 색상의 꽃이 좋아졌다.
이렇게 또 한 번 나이 듦을 느낀다. 스무 살의 나는 흐릿한 것만 좋아했었고, 대체로 잔잔하고 우울한 팝을 들었었다. 서른 살의 나는 예술성이 높은 글들만 사랑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씩씩한 게 좋고, 배부른 게 좋으며, 뭐든지 정확하고 명확한 게 좋고, 긍정적이고도 생기 있는 것이 좋다. 철이 든 것일까 나이가 든 것일까. 이제는 그저 속 편한 것이 좋다.
시뻘건 꽃을 보고 좋다 이쁘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보며, 내가 이럴 줄 몰랐다는 생각을 한다. 스무 살과 서른 살에는 내게 삶은 버겁기만 했다. 나는 내가 삶이 끝날 때까지 골치 아픈 것들만을 향유하며 살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이제 통속적이고 대중적이고 단순하고 다정한 것들이 좋다. 그리고 나는 스무 살이나 서른 살로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조금 멋없어도, 조금 모양 빠져도, 시뻘건 철쭉을 보며 나도 모르게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대는 아줌마가 되었어도 지금이 좋다. 괴롭지만 있어 보이던 그 시절보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속 편한 지금 이 좋다. 마흔 즈음이 돼서야 나는 예쁜 꽃을 보며 사진을 찍고 예쁘다고 음미할 줄 아는 여유를 갖춘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