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소음, 속마음으로부터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가장 쉽다. 어쩌면.
어쩌면,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가장 쉽다. 거짓이기에. 거짓일 수도 있으니까. 진짜는 나도 잘 모르겠다. '술'이 관여하는 어떤 자리에서는 흔히 '속마음'이나 '진실'이라는 커다란 명제를 가진 이야기를 잘도 풀어내길 원한다. 각자 안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그런 것들이 뱅뱅 돌아가다 멈추는 술병에 의해 지목당해 꺼내져야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게임을 가장 잘하는 사람은 단연 나였다. 나는 당시 '시원하고 털털한 아이'로 불렸으며, '시원하고 털털하다'는 것은 술자리 빠지지 않고 분위기 주도하고 재미있는 게임 많이 알고 술자리가 막바지로 치달을 때에도 한결같은 곧음으로 분위기를 살리며 모든 이들의 비밀을 하나씩 빼먹고는 자신의 비밀까지 거하게 털어놓고 술자리를 아주 잘 마무리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술자리에서 진실을 뱉은 아이들은 다음 날 연락이 두절되거나 머리를 싸맨 채 바닥을 뒹굴거나 나에게 전화가 와서 정말 자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 몇 번이나 묻곤 했다. 반면 나는 술에 대한 숙취는 있되, 진실에 대한 숙취는 없었다. 당연했다. 나는 술은 마셨지만, 진실을 뱉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에겐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가장 쉬웠다. 흔히 말하는 '시원하고 털털한 아이'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뭐든 신빙성이 있었다. 휘청휘청 술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돌아다니던 녀석이 갑자기 자세를 잡고 가만히 앉아서는 한숨을 동반하고 '이거 진짜 비밀인데'를 뱉게 된다면 누구나 그다음에 올 말에 관해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누구나 그다음에 올 말이 '비밀'이라는 것을 믿게 되지 않을까.
아무튼, 난 교묘히 비밀을 써먹고 다녔다. 거짓도 있었고, 진실도 있었다. 거짓과 잘 버무린 탓에 거의 거짓이 되어버린 진실도 있었다. 그러한 것들을 내 안에 몇 가지씩 가지고 다녔다. 이것도 일종의 자기 방어랄까. 당시 나의 곁에는 콩 한쪽은 안 나눠먹고 무조건 비밀을 주고받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매일 비밀이 생겼다. 나는 내 안에 진짜 비밀은 저 깊이 숨겨두고 그나마 비밀이라고 보일 수 있는 몇몇 가지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 이야기들은 나의 이름표를 붙인 채 멀리멀리 떠나갔다. 내가 잠시 망각한 탓이었다. 그런 자리에서는 솔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때부터였는지, 아니면 그전부터였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나는 가짜 비밀을 여러 가지 달고 다닌다. 혹부리 영감처럼. 금도끼, 은도끼 오만가지의 도끼가 다 들어있는 조그마한 샘의 산신령처럼 오늘은 이 비밀을 꺼낼까, 저 비밀을 꺼낼까 재보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진짜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나도 모른다. 매일 마음에 묻다 보니 어디에 묻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분명히 그 위에 돌 하나를 얹어놨는데, 그게 저 돌이었더라, 이 돌이었더라, 하며 애꿎은 마음만 파헤친다.
살고 있는 집 계단 벽에 대자보가 붙었다. 누군지 알아볼 수 없게 프린터 되어 정갈한 글씨는 도중에 진한 빨간 글씨를 품고 있어 더욱 살벌하게 느껴졌다. 새벽 2시, 4시까지 세탁기를 돌리는 당신은 정신병자입니까?라는 글씨를 읽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적어도 우리 집을 저격하는 글은 아님에 안심했지만, 나는 우리 아파트 동에 이런 글을 써붙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새벽까지 다른 집의 사정은 생각지 않고 세탁기를 돌리는 집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양옆으로 두 집, 위로 다섯 집이 있어 총 10가구가 사는 조용한 아파트였다. 나는 현관을 걸어 나오면서 다시 한번 아파트를 돌아보았다. 요즘 나는 우주의 먼지라는 생각을 자주 하고 사는 중이라, 드넓은 우주 은하계에 속해있는 지구에 속해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속해있는 어느 지역에 속해있는 어느 작은 동네에 속해있는 무척 작은 아파트에서 어느 소음 때문에 이런 복작복작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꽤 재미있으면서도 서글프게 느껴졌다. 놀랍게도 며칠 동안 아파트가 조용했다. 그 글을 읽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고 있는 뜻이 되겠다. 조용한 소음이 좋았고, 반면에 내 몸에서 나는 모든 소음이 너무 시끄럽게 들릴까 봐 마음을 졸였다.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다니 서글펐다. 마음을 졸이며 집안에서의 소음을 최소화했을 9가구를 생각한다. 내 마음에 대자보를 써붙이고 싶은 날이다.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헛된 상상과 망상과 자책을 자꾸 하게 만드는 감정, 누굽니까? 잠을 못 자겠습니다 당신은 정신병자입니까?] 써붙이고 싶다. 그러면 좀 조용해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