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 말고 '나를 위한 거리두기'

어느 정도의 거리두기

by 김단한

어스름한 저녁이 되거나 많은 이들과 꼭 함께 해야 할 것만 같은 금요일이나 토요일과 같은 날이 오면 나는 가끔 내가 좋았다가 싫어지곤 했다. 누군가를 만나고는 싶은데 만날 사람이 없어 멍한 날엔 바닥에 내려앉은 빛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만 줄곤 보고 앉아 있었다. 친구가 많고 적음이 나를 판단하는 어떤 척도가 될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친구가 많지 않다. 친구가 많은 나의 어떤 친구는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누군가와의 약속으로 정신없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러한 바쁨이 없는 나는 한없이 느긋했지만 마음은 바쁜 이상한 감정을 느꼈고.


억지로 많은 이들을 떠올려보지만 정작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럴 땐 내 손가락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셋까지 헤아리고 나면, 나머지 손가락은 황당한 상태로 흔들거릴 뿐이다.


일상이 회복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는 서로에게 적정거리를 선사했다. 서로가 서로를 만날 수 없어 미안해했고, 아쉬워했다. 매일 만나거나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땐 겪지 않았을 감정이었을 것이다. 영영 몰랐을 감정, 어쩌면 몰라도 되었을 감정을 느끼면서 우리는 거리를 넓혀갔다. 한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을 줄여갔다. 우리는 거리를 둬야 했다.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다시 다가서고 싶어 했다. 보이지 않는 벽을 넘어서고 싶어 했다.


사람과의 거리를 법적으로 두는 것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피해를 입은 사람과 피해를 주는 사람이 생각난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피해를 준 사람이 자신의 옆에 오지 않길 원한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피해를 준 사람은 우악스럽다. 직접 만나 사과를 하고 싶다는 핑계로 선을 넘기도 한다. 법적으로 거리를 두게끔 하였지만, 그러한 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일어나는 불상사도 한없이 많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무엇이나, 자신을 더는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 무엇,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과 우리는 떨어져야 할 의무가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났지만, 나는 '나를 위한 거리두기'를 여전히 실천 중이다. 혼자 있을 때 나는 안전하다고 느낀다. 가끔은 나를 자학으로 이끄는 너무나 무차별한 고독이 휘몰아치곤 하지만, 나는 혼자 있을 때 더 안전하다고 느껴야 하고 가끔은 혼자여야 할 의무를 느낀다. 나는 나를 기쁘게 만들고, 슬프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무조건 타인에게서만 찾고 싶지 않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정말 제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혼자임을 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느낀다. 나를 위한 모든 것이 타인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숲을 좋아하는 나는 가끔 인터넷에 숲 사진을 검색해본다. 안개가 잔뜩 내린 숲길이나 비에 젖은 나뭇잎과 같은 것을 볼 때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crown shyness'를 알게 된 것도 한창 숲 사진을 검색할 때였다. 수관 기피 현상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일부 수종들 사이에서 관찰되는 현상으로 나무들의 윗부분이 서로 닿지 않은 채 일정 공간을 남겨두어 나무 아래까지 충분히 햇볕을 받아 함께 자라는 것을 말한다'라고 한다. 서로 닿지 않으며 함께 자란다니, 이렇게 낭만적일 수가. 과학자들은 '꼭대기의 수줍음'이라고도 부른다는데 수줍음이라니, 서로와의 거리두기에 애절한 단어가 아니라 수줍음과 같은 살구빛 형태를 띠는 단어가 자리할 수 있다는 것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어느 정도의 거리는 우리에게 필요하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우리는 함께 잘 자랄 수 있어야 한다. 나부터 꼿꼿이 서서 함께 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혼자 있을 때 더욱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어느 시간마다 외로움에 허덕이는 사람이 더는 되고 싶지 않다. 외로움이나 어떠한 고독감, 어떠한 우울감은 나를 한 움큼 더 자라게 만드는 무엇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