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라 '레벨업'은 뒷전

경험치가 쌓인다면 레벨업은 금방입니다

by 김단한

승강기를 타도 가장 구석자리에 선다. 오른쪽 구석이라던지, 아니면은 왼쪽 구석이라던지. 본의 아니게 사람들이 꽉 찬 승강기를 타게 되어 정중앙에 서게 되었다면 눈을 꼭 감고 올라가는 숫자만 헤아린다. 카운트다운처럼, 10,9,8,7 이렇게 떨어지는 숫자나 반대로 7,8,9,10 올라가는 숫자를 보면서 숨을 꾹 참는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그렇게 된다. 그리곤, 곧 내리는 사람이 빠져나온 자리를 귀신같이 찾아들어가 몸을 숨긴다. 내 몸이 4면이라면, 3면 정도는 아니 최소한 2면 정도는 가려지거나 벽에 붙어 안전이 보장되어야 나는 겨우 숨을 내쉴 수 있다. 아까도 말했지만, 누가 그러라고 시켰거나 그렇게 교육받은 적이 없다.


나는 내가 '중앙을 즐길 줄 아는 자'라고 생각했는데, '천부적인 구석러'였다. 구석을 귀신같이 찾아 들어가는. 어느 낯선 공간에 가게 되면 일단 주변을 한번 살피곤 좀비가 들어오거나 무장 군단이 들어올 때(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니 혹시 있을 수도)를 상상하며 미리 대비하곤 한다. 몸을 바로 던져서, 이렇게 저렇게 해서, 저 테이블을 넘어서 저기 몸을 숨기면 완벽해.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는 거다. 현실은 엉엉 울며 바닥을 기느라 제일 첫 번째로 인질이 될 확률이 매우 높지만. 망상과 상상과 몽상은 나와 떨어질 수 없기에.


나는 게임을 할 때도 구석자리를 찾는 것에 소질이 있다. 수시로 생명을 채워주는 생명 팩을 먹어가며 해야 하는 게임에 있어서는 생명 팩이 있는 자리를 외우려 노력한다. 단, 커다란 생명 팩이나 적군에 진로가 포함되어 있는 생명 팩은 포함하지 않는다. 그건 굉장히 바보 같은 짓인데, 나는 평소에도 그렇게 죽은 적이 꽤 있기 때문에 이젠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다. 게임에서도 죽는 건 무섭다. 죽고 나면 공허하고, 힘이 빠진다. 다시 삶을 살아야 하는 건 정말 막막한 짓이다. 특히나 save 하지 않았을 땐 더더욱.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러 이유로, 아주 조용한 길목의 생명 팩을 사랑한다.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생명 팩이지만 어떠랴. 어쨌든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구간,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구간이면 더 좋다. 사실 탁 트여있는 게임 맵에서 그런 곳이 어디 있겠냐만은…… 잘 찾아보면 있다. 대부분은 적군과 마주하며 싸우길 즐기는 유저들이 판을 치는 곳이니, 그런 곳에 쪼그려 앉아 아까 먹은 생명 팩이 다시 뿅 하고 올라오길 기다리는 캐릭터는 나뿐이다. 그러니, 그런 곳은 나 같은 캐릭터들을 위해서라도 존재한다.


사실 난 사람들과 어울려 무언가를 쟁취하고, 1인분의 일을 해야 하는 게임보다는 지극히 1인칭 게임만을 사랑한다. 무기를 든 내 팔만 나오는 게임. 운 좋으면 다리도 볼 수 있고…….


1인칭 게임에선 난 거의 날아다닌다. 1인칭 게임이라 나의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어쨌든, 나는 그래픽이 좋은 게임을 좋아하고 그 게임을 천진난만하게 돌아다닌다. 수없이 죽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고, 수없이 헤매도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사람이 없으니 1인칭 게임은 나에게 천국이다. 내가 그곳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집을 만드는 일이다. 어떤 게임은 거점이 저절로 마련이 되어 있어서 내가 거기에 도착을 하게 되면 그 집은 내 집이 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많다. 하지만, 내가 최근까지 열심히 한 '더포레스트' 게임은 내가 직접 수많은 통나무를 도끼로 베어내고, 들고, 날라서 집을 지어야 했다. 나뭇잎 26장과 나뭇가지 18개로 작은 움막을 지을 수도 있겠으나, 거기엔 닫을 문도 없고 더군다나 그 안에 쪼그려 앉아 식인종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내 모습이 너무 처량하게 느껴져 포기했다. 나는 통나무집을 지으리라. 그것도 위를 뾰족뾰족하게 깎은 통나무 벽이 쫙 둘러싼 아주 멋진 집을.


식인종에게 잡혀간 아들을 찾는 것이 주목적인 게임에서 나는 거의 30일 동안(게임상의 시간) 집만 지었다. 남들이 모던 도끼니 모던 화살이니, 화염 총이니 찾으러 다니며 공략을 마구 뿌릴 때 나는 뚝딱뚝딱 통나무 집만 지었다는 뜻이다. 누가 뭐라고 할 텐가. 어쨌든, 반복되는(누군가에겐 의미 없는) 노동을 계속했다. 통나무 몇 백개를 나르고 깎고, 계단을 설치하고……. 바닷가 모래사장에 터를 잡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넓디넓은 바다가 보이고 뒤로는 울창한 숲이 보이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입지환경을 누렸다. 나는 바닷가가 보이는 곳에 통나무 2개를 쪼개서 만든 벤치를 놓고 하염없이 앉아 바다를 감상했다. 그러다 식인종의 소리가 귓가에 울리면 움찔해서 일어나길 반복하다, 결국 아무도 나의 바다(?)에 들어올 수 없게 집을 빙 둘러 더 높은 통나무 벽을 설치했다. 게임의 목적을 잊으면 차분해졌다. 게임에서는 절대 잊으면 안 되는 목적이지만.


게임을 한동안 하고 나면 문제점이 있다. 일상생활에 게임에서의 설정을 자꾸 끌어온다는 거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그의 얼굴에 커다란 마우스를 갖다 대어 오른쪽 버튼을 클릭한 후 뮤트. 이런 식으로 상상에 상상에 상상을 더하는……. 날 선 이야기들이 들려오면 커다란 통나무를 뚝딱뚝딱 베어 나를 중심으로 빙 두르는 상상까지. 그러려면 통나무는 몇 개가 필요한가, 이런 생각도 하고.


장황하게 게임 이야기를 한 것 같지만 사실 나의 일상 이야기다. 어느 누군가의 일상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 가면 숨이 턱턱 막힌다던지, 구석을 찾는다던지, 어떻게든 도망갈 구멍을 찾는다던지, 굉장히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이 실상은 딴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던지, 자주 목적을 잊는다던지, 그러면서도 계속, 어떻게든, 상대가 휘두른 한방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며 생을 포기하지 않는다던지, 하는 것은 게임에서나 그 어디에서든 '나'란 존재가 하고 다니는 일이다.


친구들은 나를 보며 게임에선 레벨을 올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레벨이라는 것이 올라야, 좋은 장비와 옷을 살 수 있고 그만큼 버틸 수 있다는 것. 몸을 숨기는 것도 더는 처량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저 살았다. 하고 싶은 말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도 내가 참 답답하다 중얼거리며 그저 살다 보니, 레벨업을 축하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사는 게 그런 거다. 남들보단 조금 느리지만 레벨을 올리는 것에 있어 필요한 경험치는 쌓고 있었으리라(나도 모르게). 그렇다면 나는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지금처럼 사는 것이 딱 좋겠다.


이런 나를 미워하지 않고, 미워했다가도 다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목적에 나는 다 닿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달성한 목적일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