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이란 시간을 함께 한 커피 그라인더에게서
나는 커피를 내리고, 마시고, 마지막으로 커피 그라인더를 닦을 때 행복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은데 그냥 속으로 '아~ 행복해~' 하고 그라인더를 청소한다.
다이소에서 산 천 원짜리 아이쉐도우용 붓으로 안쪽에 쌓인 커피 찌꺼기를 제거하는 일은 무척이나 재미있다. 속을 들여다보고, 보이지 않는 아주 깊은 곳은 형광등에 비춰봐야만 한다. 대충 찌꺼기가 없어졌다 싶으면 나는 후, 하고 입김을 불어 마무리한다. 그러면 아주 기분이 좋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냥 기분이 좋고 행복해진다.
커피 그라인더를 닦는 붓에는 상처가 자잘하게 나있다. 커피를 갈아주는 역할을 하는 톱니도 어느새 상처가 많다. 그걸 보면 기분이 좋다. 상처보고 기분 좋다니 좀 무서운 말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갈아먹은 커피가 많구나, 닦아 낸 커피 찌꺼기가 많았구나 하며 이 그라인더를 보게 된다.
이 칼리타 그라인더는 나와 함께 한지 어느새 1년이 되었다. 그전까지 커피를 갈아 내려마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가끔 스타벅스 리저브를 갈 때, 커피에 조예가 깊은 분들이 바에 앉아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핸드드립 커피를 보며 멋있군, 하고 생각한 게 다였다.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게 된 건, 미국으로 한 학기 교환학생을 갔던 일이 계기가 되었다. 딱히 살 게 있어서 마켓에 간 건 아니고 원래 해외 나가면 이것저것 궁금하니까. 기숙사 근처에 있는 마켓을 갔는데 글쎄 이런 게 있는 게 아닌가? 이걸 보자마자 나는 다짐했다. 가기 전에 이 커피 종류를 다 마셔보리라.
그렇게 커피를 내려마실 도구 하나 없이 그냥 무작정 구매했다. 그리고 기숙사에 와서 생각했다. 이거 어떻게 마시지. 커피 드리퍼도 없고, 종이 필터도 없고, 있는 건 컵 하나가 다였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아주 곱게 갈린 탓에 한 번 카누처럼 타 먹어 봤는데 둥둥 커피 가루가 떠다니는 걸 보며 현타가 좀 왔다. 왜 샀지 이거. 홀린 듯이 샀는데 이거 뭐 어떻게 먹어야 하나. 사야만 했다. 뭐를? 핸드드립 커피세트를. 낯선 미국에 떨어진 지 약 3일 만의 일이었다.
아마존을 통해 구매한 핸드드립 커피세트는 그렇게 나에게 소소한 행복을 주었다. 커피를 매일 사 먹지 않아도 되었고 (제일 장점),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리며 맡는 커피 향이 참 좋았고, 룸메이트에게 커피 한 잔 마실래? 하고 커피 타임을 가지며 오늘 일정이나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는 게 참 좋았다. 교환학생을 마무리할 때쯤, 나는 이 핸드드립 커피세트를 캐리어에 넣었다.
한국에 도착한 후, 나는 집 주변에 미국 마켓처럼 원두를 파는 곳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아차 싶었다. 인터넷 주문이 있지만 향을 못 맡아보니까 아쉬웠다. 인터넷 주문은 글과 느낌만으로 원두를 선택해야 했다. 원두를 바로 내려마실 수 있게 갈아서 보내주는 서비스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원두를 사야겠다 싶었다. 내 눈으로 원두가 갈아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해야 하나. 여하튼 그런 이상한 감정과 함께 그라인더를 찾았고 바로 구매했다.
조금 내려먹다 말겠지, 하고 엄마가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잘 사용하고 있다. 드르르륵, 시끄럽게 원두가 갈리는 소리가 들리면 엄마가 말한다. '엄마도 한 잔 줘, 냄새 좋다' 그러면 나는 원두를 갈고, 드리퍼에 갈려진 원두를 평평하게 담고, 뜨거운 물을 시계 방향으로 부은 후, 잠시 뜸 들이다, 다시 뜨거운 물을 내려서, 쪼르륵 담긴 커피를 엄마 꺼 한 잔, 내 거 한 잔 머그잔에 담는다. 룸메이트와 가졌던 커피 타임을 엄마와 갖는다. 요즘 엄마와 하는 이야기 반은 미스터 트롯 얘기다. 커피와 트로트. 조화가 아주 신선하고 좋다.
다 마신 머그잔을 들고일어나면 드리퍼에 담긴 원두 찌꺼기가 있고, 커피 찌꺼기로 뒤덮인 그라인더가 있다. 드리퍼에 담긴 갈린 원두 찌꺼기는 탈취에 좋으니 음식물 쓰레기봉투 옆에 놓는다. 그리고 손에 익은 것처럼 그라인더를 분해한다.
상처가 잔뜩 난 붓으로 그라인더 곳곳에 남겨져 있는 잔해들을 청소한다. 그러면 나는 이상하리만치 행복하다. 행복이란 자고로 이런 것이지, 하며 휘파람도 분다. 이미 본방송으로 본 미스터 트롯 재방송을 보는 엄마는 뭐가 그렇게 기분 좋으냐며 묻는다.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그냥 기분 좋아, 이거 청소할 때"
왜 기분이 좋은 지, 행복한 지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나는 그냥 커피 그라인더를 청소할 때 행복하다. 더 깨끗하게 닦기 위해 그라인더를 분해하고, 안쪽까지 붓으로 찌꺼기를 제거하고, 마지막으로 후! 불고, 카페 행주로 바깥쪽까지 닦아내는 그 과정이 말이다. 정확한 이유는 더 갈고, 내려 마시고, 청소해야 알지 않을까. 그 이유를 좀 늦게 알게 되면 좋겠다. 이유 없이 행복한 일도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