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해 Feb 22. 2024

상요우를 짝사랑하다

20살이 넘는 연하남

  아들뻘인 애를 어떻게 짝사랑할 수 있느냐고? 타이베이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타이베이의 공기는 따끈따끈하고 촉촉하고 나른하기 때문에.


상요우와의 만남

  랭귀지스쿨의 마지막 학기 때였다. 이 학교에서는 5번째 교재를 배운다면 거의 최고급반인데, 그러니까 내가 중국어가 어느 정도 될 즈음에 상요우와 한 반이 되었다. 

  새 학기의 첫날은 반 배정이 새로 되기 때문에 교실에 들어가면 새로운 얼굴들과 어색한 만남을 하게 된다. 내성적인 나는 먼저 말 거는 것을 두려워해서 이런 '첫'이 힘들다. 교실에는 아는 얼굴이 하나 없는데, 다행히 미국에서 왔다는 녀석이 먼저 말을 붙여줘서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 나는 나답지 않은 유쾌한 사람이 돼서 새 얼굴들과 재잘재잘 떠들었다. 거의 수업 종이 치기 전쯤에야 한 녀석이 교실로 들어오는데, 내가 농판스럽게 녀석을 반겼다. 

  "헤이 슈아이꺼(帅哥, 미남 오빠), 우린 자기소개 다하고 앉았어. 지금이 네 차례야."

  긴장을 할 법도 한데, 상요우는 '뭐 그런 재미없는 농담을 하니'하는 식으로 풋 웃어 보이고는 그냥 자리에 가 앉았다. 

  '어, 녀석 쫄지 않네?'가 그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녀석은 못생기지 않은 정도의 외모지만, 열등감 좀 있겠구나 싶도록 키는 작다. 부모님은 대만인인데, 포르투갈로 이민을 가서 녀석을 낳았다. 그래서, 그는 생긴 것은 동양애지만, 사고방식은 딱히 동양적이지 않아 어떤 신비함이 있다. 가끔, '의외잖아!'하고 놀라게 되는 구석이 영 사람을 유혹한다. 


마음이 동(動)해버린 날

  학교에서는 3개월의 한 학기가 끝날 즈음에 교사의 지도하에 책거리 여행을 하도록 권장한다. 우리 반 선생님은 자기가 수업하는 기초반과 우리 반을 한꺼번에 데리고 가서, 원래는 두 번 수고해야 할 일을 하나로 줄였다. 그 바람에 우리는 중국어로 소통하자면 조금 답답한 초급반 애들과 함께 여행을 가게 된다. 

  초급반의 남미 아가씨는 상요우랑 같은 포르투갈어를 쓰는데,  몇 마디 나누더니 상요우의 껌딱지가 되어버렸다. 오전에 진과스(金瓜石)를 돌아보고는 못내 아쉬워, '지우펀(九份) 같이 놀러 갈 사람?' 했을 때, 초급반 애들은 다 빠지는데, 그녀는 상요우에게 반해 따라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남미 아가씨는 상요우 옆에 앉아, 교태 어린 목소리와 웃음소리로 '난 네가 너무 좋아, 날 먹어줘!'를 아주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중국어가 부족한 남미 아가씨는 포르투갈어로 질문을 하는데, 상요우는 꼬박꼬박 중국어로 답을 했다. 

  '상요우는 왜 남미 아가씨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해주지 않나? 남미 아가씨는 상요우가 하는 말의 반은 알아듣나?'

  나는 이 지점에서 무슨 근거로, 상요우는 남미 아가씨에게 대답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들려주고 있다는 착각을 해버린다. 그리고 그의 차분하고 서근서근한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동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목소리에 반응하는 이상한 벽(癖)이 있다. 어떤 남자들이 검은 망사스타킹에 욕정이 불타오르는 것과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그의 연락을 받았을 때

   아들뻘인 상요우에게 마음이 두근거린다는 것은 참 난감한 일이다. 학기가 끝나 다시 볼 일이 없다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석사반 신청을 준비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상요우의 문자를 받는다. 

  "얼굴 한번 보죠?"

  "나 지금 한국이야, 잘 지내지? 타이베이로 돌아가면 연락할게.”

  그는 너무도 무료한 어느 날에 지나간 여러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고, 나도 그 여럿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문자에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하지만, 그 문자에 '상요우가 나한테 관심이 있나?'하고 마음이 설레는 것이다.


  다시 타이베이로 돌아왔을 때, '연락할게'라고 했다고 정말 연락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라고, 한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잘 잊어두었는데, 만나면 마음이 다시 설렐까봐 겁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또 셀레고 싶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는, 드라마를 보다 어느 대사에 꽂혀서 상요우에게 연락을 넣는다. '철이 들자면 아픈 일도 필요하다' 뭐 이런 취지의 대사였던 것 같다. 마음이 아파도 좋으니, '상요우는 내게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를 꼭 확인해야만 되겠다고, 그를 만나야겠는 것이다. 

 

다시 만났을 때

  예전의 상요우는 남의 말을 가만히 들으면서, 살짝살짝 질문을 던져 상대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스타일이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영혼은 좀 늙다리 같았달까.

  오늘 상요우는 혼자 가득 이야기를 한다. 학교는 어떻고, 자기 학과 공부는 어때서, 미래 전망은 어떤데 하면서. 나는 상요우가 좋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는 감미롭기 때문에, 그가 하는 어떤 이야기도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내 마음 같지 않다! 내가 조금 내 이야기를 했을 때,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지루하다가 보였다. 잠깐 이야기가 끊긴 사이를, '요사이 과제가 많고 오늘 밤에 제출해야 하는 과제도 있다'는 소리로 채우는데, 그건 어째 그만 일어나자는 암시인가 싶은 것이다. 내가 커피 다 마셨냐고 물었을 때는, '들고 가도 된다'라고 답하는데, 그건 명백히 '그만 일어서자'는 소리였다. 

  돌아서서 생각이 닿는데, 그는 점심만 먹고 일어설 생각이었던 것 같다. 커피숖에 가 앉았을 때, 상요우는 가방도 벗지 않았다. 늘적지근하게 앉아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의 행동은 생각을 반영하는 거라서, 단순히 그냥 ‘가방 벗는 것 잊었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잊는 수순

  상요우는 랭귀지 스쿨이 끝나고 곧장 그 남미 아가씨와 동거에 들어갔단다. 

  "상요우, 너 나빠. 넌, 걔가 정신적으로 좀 더 성숙할 시간을 줬어야 해."

  "걔 충분히 어른이에요."

  "그 얘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걔도 알건 다 알아요."

  "네 여동생이라고 생각해 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말자 남자랑 동거를 한다고 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그 애가 선택한 거예요. 내가 강요한게 아니에요."

  

  그가 그녀와 동거를 한다는 소리는 내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가 그녀와 동거를 한다는 그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나는 그가 한 짓이 어째 비열해 보여서 싫었다. 그는 혼자 대만에서 지내는 것을 좀 외로워했는데, 랭귀지 스쿨을 다닐 때, 수업이 끝나면 혼자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참 싫어했었다. 놀아줄 사람이 있기만 하면 밤늦도록 어떻게든 놀았다. (한 번은 내가 한국문화 교류수업에 쓸 한국 색채가 나는 카드를 만드느라 종이로 접은 한복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했는데, 그가 한 반 친구들을 다 붙잡아놓고 밤새 그걸 접어줬다. 그는 그 정도로 혼자 있는 밤을 싫어한다.)

   그는 남미아가씨를 정말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냥 같이 있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동거를 하는  것 같기 때문에 나는 그게 비열하게 느껴진다. 내가 좋아하는 상요우는 그럴 수 없다! 그러면 안 된다!


 그렇지만 나는 다정했던 '옛날의 상요우'를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짝사랑했다. 새로운 짝사랑이 나타나고서야 잊었다. 그래, 이번에는 누구를 짝사랑하느냐고? 이건 아직 끝나지 않은 짝사랑이라 말하기 부끄럽다. (끝나고 나면 덧붙일지도 모르겠다.) 

  이 짝사랑이 끝나면 또 다음 짝사랑을 할는지도 모른다, 타이베이에서라면.


매거진의 이전글 대만에도 수제비가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