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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해 Feb 16. 2024

레시피 창작능력

아무 재료나 주세요, 뭐든 만들 수 있어요

  대만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능력 하나가 생겼다. 예전에는 음식을 할 때, 카레에는 이런 재료가 꼭 필요하고,  잔치국수 고명으로는 이 몇 가지를 꼭 올려야 하고, 스파게티에는 반드시 올리브기름을 써야 한다는, 혼자만의 어떤 규정이 있었다. 대만생활을 하면서 이 비융통성에 변화가 생겼다. 

  대만에서는 똑같은 재료를 못 구할 때도 있고, 똑같은 걸 구하자면 한국에서는 싼데 대만에서는 턱도 없이 비싸고, 그러다 보니 아무 재료나 있으면 그 재료 안에서 얼렁뚱땅 먹을만한 것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생겼다.


  양배추, 시금치, 고구마줄기, 카레 한 조각이 있다. (카레 '한 조각'이라고 말하는 것은 카레가 우리나라처럼 가루타입이 아니고, 초콜릿처럼 한 조각 한 조각 잘라내는 고체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라면 이 재료로 뭘 만들 수 있겠나? 

  나? 카레국수를 창작해 냈다. 맛이, 맛이! 

  싼 맛에 샀던, 양배추랑 시금치랑 고구마줄기가 먹어도 먹어도 남았다. 또 카레 한 조각이 남아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이 재료면, 베트남식당에서 먹어본 적이 있는 카레쌀국수를 흉내 내볼 수 있겠다 싶은 것이다. 고기 한 조각이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귀찮아서 사러 나갈 수는 없고. 

  끓는 물에 양배추랑 시금치를 대충 손으로 찢어 넣고 카레를 풀어 국물을 만들었다. 내가 가진 재료는 쌀국수가 아니고 밀가루 소면이라 따로 끓여 찬물에 헹궈낼까 싶지만, 그것도 귀찮은 일. 만들어낸 국물에 바로 넣고 끓였다. 후추 좀 뿌려 넣고 소금으로 간한다. 영양을 고려해서 딱 하나 남은 계란을 풀어 넣을까 싶었는데, 모서리가 깨진 채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지라 상해서 버렸다. 있는 재료를 다 때려 넣고, 카레로 국물 맛을 낸, 완전 제멋대로 레시피로 만든 카레국순데 아주 환상의 맛이었다! 


  닭강정 소스도 개발했다!

  대만의 고기 요리는 대체로, '맛있는 고기로 뭔 짓을 한 거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맛이 없다. 고기 요리에 들어가는 향신료 중에 하나가 한국인 입맛에 대체로 맞지 않는 요상한 냄새를 내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본 가장 심각한 케이스는, 대만 전체에서 그 향신료 냄새가 난다며, 대만 여행 내내 세븐일레븐의 삼각김밥만 먹었다. (그 향신료 이름을 아직 못 찾아냈다. 다음에 알게 되면 덧붙이도록 하겠다.) 나도 처음에는 이 향이 살짝 거북했다.

  나는 원래 고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채식하는 편이라, 대만의 고기 요리가 맛이 있던 없던 별로 불편한지 모르고 지냈다. 그런데, 중년의 뱃살 압박으로 '16시간 공복, 8시간 먹기'를 하면서, 점심 한 끼는 잘 먹어줘야 해서, 일부러 고기를 챙겨 먹으면서 고민이 시작되었다. 

  짜지(炸鸡, 닭튀김)에는 그 향신료가 들어가지 않아서 그래도 제일 먹을만한데, 대만은 짜지(炸鸡)에 잘 뿌리면 후춧가루가 끝이고, 뭐 달리 소스를 발라 주지 않아서 먹다 보면 좀 니글거린다. 그래 맛없는 고기를 먹기 위해 맛있는 소스를 발명해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소스는 이렇게 만든다. 대만 슈퍼에서 산 월남쌈 소스와 한국에서 가져온 초고추장을 적당히 섞으면 끝이다. 그러면, 단짝 새콤 매콤한 닭강정 소스 맛이 나서, 한국에서 먹던 맛이 된다. 


  나 또 요리를 아주 간단히 하는데도 달인이 되어간다.

  대만에는 집집마다 필수품처럼 전기밥솥이 하나쯤 있는데, 바로 이 대만 전기밥솥을 이용하면 모든 요리가 간단해진다. 대만의 전기밥솥은 한국의 압력밥솥이랑 좀 다르다. 익힐 음식을 그릇에 담아 밥솥에 넣고, 밥솥 바닥에 물을 한 컵쯤 붓는데, 그 물이 뜨거운 증기로 변하면서 음식을 익히는 식이다. 

  돼지갈비탕을 만들자면, 그릇에 돼지갈비, 다진 마늘, 간장, 설탕, 물을 담아 그냥 밥솥에 넣어만 두면 된다. 가스레인지 불로 끓인 음식과 대만 전기밥솥의 증기로 해낸 음식의 맛은 물론 차이가 있다. 하지만, 재료를 뚝딱 섞어서 밥솥에 넣어만 두면 끝이기 때문에 끓어 넘치지는 않을까 졸아버리지는 않을까 싶어 가스불 앞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어서 엄청난 시간을 벌어준다. 그 시간이면 중드 한편을 볼 수도 있고, 책 수십 페이지를 읽을 수 있다.

  전기밥솥으로 밥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계란찜도 할 수 있고, 죽도 끊일 수 있고, 계란도 삶을 수 있다.


  레시피를 창작하는 데는 무슨 능력이 필요한가? 모방하는 능력과 레시피의 부분 부분을 섞는 능력에 다소의 게으름이 도움이 된다. (게으르지 않으면, 부족한 재료들을 사러 나가게 된다.) 대만 생활을 하면서, 나 점점 레시피 창작에 자신감이 붙는다. '아무 재료나 주세요, 뭐든 만들 수 있어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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