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다

by 김동해

뭔가 준비가 되고 지도교수에게 시간을 내주십사 하는 게 아니라, 당돌하게도 '미리 다음 약속을 잡아주세요, 그때까지 얼마큼 써올게요.'가 내가 지도교수와 교류하는 방식이다.

이번 학기의 목표는 논문을 3장까지 쓰고 1차 구술시험을 치는 것이다. 대만으로 돌아와서도 논문을 쓸 의욕이 딱히 생기지 않아, 이러다간 이번 학기에 목표치만큼 못 해내겠다는 위기감이 들어, 무작정 지도교수를 만나러 갔다. 석 박사생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지도교수를 자주 만날수록 졸업이 빨라진다!'


오늘은 정말 별 볼일이 없었다. 그저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만났다.

"다음 주에 논문 목차를 잡아올게요." 그러니, 다음 주 약속을 지금 미리 잡아달라는 뜻이다.

"만들려는 교재 개요도 좀 잡아와 봐."

"네."

2주 후로 잡을까도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진행하자고, 1주일 후로 잡았다.

하지만 몇 주 뒤에 있을 한국어 가이드 시험 준비를 하느라, 딱 하루 논문 목차를 고민하다 아예 손을 놓고 가이드 시험 준비를 했다. 약속일 하루 전에 교수에게 약속을 취소하는 문자를 보냈다.

"교수님 죄송해요, 제2장 문헌연구 부분에 무슨 내용을 넣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혀서, 이번 약속을 좀 미뤄야 할 것 같아요, 준비가 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리고는 한 달여 가이드 시험 준비를 하느라 논문에서 손을 땠다.

가이드 시험이 끝나고 초스피드 하게 논문 목록을 다 짰다. 그리고 지난번 약속을 깬 잘못이 있는지라, 최대한 예의를 갖춘 표현으로 문자를 보냈다. 내가 대충 쓰고, Chat gpt에게 최대한 예절 있는 표현으로 고쳐달라고 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지난번 박사논문목록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금 준비가 다 되었으니 다시 시간을 좀 내주시길 바랍니다. 송부하는 파일은 논문 목록과 교재 편찬 개요입니다." 한글로 번역하자니 별로 예의가 안 느껴지는데, 중국어로는 선깐빠오치엔(深感抱歉,깊이 사과드립니다), 칭닌(請您, 당신께 부탁드려요) 같은 용어가 쓰였다.

내가 문자를 보내는 것과 동시에 '읽음'이 떴다. 마치, 내 문자를 기다리고 있어서 나와의 LINE 대화창을 보고 있었던 것처럼. (LINE은 대만 사람들이 쓰는 우리나라 카카오톡 같은 앱이다.)

나는 제법 성실한 학생이어서, 한번 약속하면 잘 지키는 편이다. 석사 논문을 쓸 때는, 매 2주마다 '얼마큼 써올게요"라고 약속을 하고, 꼬박꼬박 해냈다. 약속을 하고 깨는 일이 없었던 성실한 학생이, 고작 논문 목차 짜온다고 해놓고, 한 달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으니, 지도교수는 의아하게 생각했을까? 걱정을 했을까? 궁금해했을까?

내가 문자를 보낸 시간은 임교수가 대학부 수업이 있는 시간인데, 교수는 문자를 읽은 즉시 답장을 줬다. 이틀 후로 약속이 잡혔다.


교수실로 찾아갔다. 임교수는 오늘 특별히 조용조용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임교수 오늘 너무 부드럽잖아!'

나는 목소리에 뻑 가는 사람인데, 오늘 임교수의 목소리는 좋아하는 이성에게 말을 건넬 때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는 나지막한, 부드러운, 섹시한, 유혹적인, 편안한, 간질간질한 그런 느낌이다.

'내게 그런 목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이러면 설레잖아요.'

임교수를 눈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지도교수는 가끔 내게 너무 친절해서, 내 마음을 쿵쾅거리게 한다. 내 소개로 임교수를 지도교수로 택한 쇼우칭은 늘 이렇게 말한다.

"임교수는 너한테 정말 잘해주는 것 같아."

“아니거든! 임교수는 모든 학생한테 다 친절해."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나도 느낀다, 내게 특별히 친절한 것 같다고. 하지만 나는 내 것이 아닌 상대에게 셀레고 싶지 않다. 아니, 사실은 설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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