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여권, 크레덴시알

출발점 생장에서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다

by 김동해

2012년 8월 19일 일요일

날씨: 파리는 오븐 속에서 굽히는 것처럼 뜨거움

일정: 모스크바에서 파리를 거쳐 생장피드포르(St.Jean Pied de Port)까지


드디어 비행기 갈아탈 시간이다. 공항 화장실에서 아침 양치와 세수를 한다.

파리까지는 파리에어라인이다. 모스크바까지는 러시아 항공인 아에로플로트를 타고 왔다. 두 나라의 스튜어디스는 확연히 대비된다. 프랑스 스튜어디스는 말이 엄청 많다. 음료를 서빙하다가도 한참을 서서 동료와 시끄럽게 떠들었다. 나는 러시아 미녀들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녀들에게는 동양적인 수줍음이 있다고나 할까.

내 옆에 앉은 흑인 남자도 수다가 심하다. 내가 받아주면 파리에 도착할 때까지 지껄일 태세다. "어, 그래, 그래."하고 대충 대화를 접는다. 파리까지 4시간 남짓 걸렸는데 그는 좀 지루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치 때문에 '적도 기니(Equatorial Guinea)'라는 나라가 있는 줄을 알게 된다. '기니'와 '적도 기니'는 다른 나라다.'


파리를 하루 이틀 둘러보고 걷기 여행을 시작해도 좋았겠지만 나는 파리를 계획하지 않았다. 이 여행의 목적은 '걸어서 산티아고까지'인데, 파리에서 에너지를 빼앗겨 산티아고까지 완주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사실 파리 여행을 위해 숙소를 검색하고 교통편을 파악하는 것이 힘들었다.

여행을 준비해 보니 계획을 짜는 일이 최고로 힘든 것 같다. 내가 자유여행 계획을 쉽사리 잘 짜기만 하면 더 쉽게 훌쩍훌쩍 떠날 수 있을 터다. 나는 이번 여행을 위해 딱 1일 치의 계획 밖에 세우지 못했다. 그걸 하는데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1. 파리 공항에서 몽파르나스역으로 가기, 2. 바욘행 가차 타기, 3. 바욘에서 생장행 기차로 갈아타기, 4. 순례자 사무실을 찾아가 알베르게(allbergue, 숙소)를 안내받기>까지가 내가 세운 여행계획의 전부였다.

이삼일 동안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 과정을 머릿속에 시뮬레이션했다. <공항에서 몽파르나스역까지는 저렴한 지하철을 타자! 생장행 기차를 갈아타는 데는 딱 6분의 시간밖에 없으니 엄청 주의할 것!>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했던 것과는 달리 파리공항에 도착해서부터 헤매기 시작한다. 경찰인지 군대인지가 진입하여 일부 구간을 통제하는 바람에 내 경로가 엉키기 시작했다. '저길 막고 있으면 어디로 내려가란 말이야?'

어찌어찌 지하로 내려는 왔는데, 기차역 가는 지하철 표는 어디서 사야 할지 모르겠다. 테제베(TGV) 매표소만 보인다. 발견한 김에 한국서 예매한 기차표를 발권받기로 한다. 기계 앞에서 주눅 드는 나는 발권기계를 무시하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 매표원은 젊은 흑인 여자다. 생장 가는 기차를 예매했으니 발권해 달라며 신용카드를 내민다. 예매한 표를 못 찾겠단다. 예매한 것이 맞냐고 도로 묻는다. 아, 난 갑자기 당황스럽다. 한국에서 이 카드로 몇 시 표를 예매했다고 다시 한번 찾아봐 줄 것을 부탁한다. 그녀, 뭐라 뭐라고 하는데, 통 못 알아듣겠다.

"영어로 좀 이야기해 줄래?"

"내가 지금 영어 아니면 뭐 하는 거 같은데?"

그녀의 영어 발음은 어찌나 이상한지 나는 그녀가 불어를 쓴 줄 알았다. 불친절이 생긴 것만큼이다. 줄은 밀려있고 한 동양인 여자는 영어를 띄엄띄엄하고 있으니 그녀가 짜증을 낸다.

"난 이 카드로 확실히 예매했어. 알았어, 밖에 있는 기계로 발권해 보지 뭐."

그녀는 그러든지 말든지 줄에서 나오기나 하라는 표정이다.


한국에서 예매번호를 기록해 오거나 예매 확인 메일을 출력해왔어야 한다. 서울서 조카랑 노느라 미처 챙기지 못했다.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였다. 어느 블로그에서 보지 않았던가. <기계로 발권하는 거 참 쉬어용!>

기계로 기차표를 성공적으로 발권한 한 가족을 발견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그는 친절히 도와준다. 그러나 생장역은 매우 작은 역이라 기계로 표를 발급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뜬단다. 그는 사무실 매표원에게 문의해 보잔다.

그러나 줄은 너무 길다. 그 줄을 다시 다 기다리다간 기차표를 끊기 전에 기차가 출발해 버리겠다. 기차를 놓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정신적 피로가 밀려오면서 입이 바싹 타고 머리가 아프다. 에비앙 생수를 하나 사 마시면서 정신을 달랜다.


'일단 먼저 몽파르나스역으로 가자. 생장으로 가는 많은 사람들은 그 역에서 출발한다. 그곳 매표원은 어떻게든 내가 예매한 표를 찾아내리라.' 매표원이 내가 예매한 표를 찾지 못하면 어딘가 인터넷을 쓸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이메일에 예약 번호가 전송되어 있다. 지하철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비싸지만 공항리무진버스를 타기로 한다. 기차시간에 늦을까 봐 마음은 조마조마하고 날씨는 엄청나게 뜨겁다.


공항리무진버스에서 한 여성이 내 옆에 앉았다. 그녀에게 인터넷을 어디서 쓸 수 있을까를 물어볼 양으로 말을 걸었다. 자기는 프랑스 사람이 아니어서 잘 모른단다. 아제르바이잔 사람이고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니스로 가는 중이란다. 그녀는 알아듣기 쉬운 영어로 한국 소식을 물어왔다. 그녀는 국제학을 공부한다는데, 한국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까지 똑똑히 발음했다. 내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미안스러울 지경이었다.

프랑스 흑인 매표원의 불친절에 의기소침해졌는데, 그녀가 다정하게 쓰다듬어 준 기분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다시 만날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준 따스한 느낌은 내 여행의 출발에 용기를 주었다.


몽파르나스역, 이번에도 흑인 매표원이다. 카드를 내밀며 한국에서 예매를 하고 왔다고 하자, 그녀가 간단히 예매번호를 찾아내고 마침내 기차표를 준다. 아, 고마워라.

처음 보는 TGV 기차표, 이 기호들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친절해 보이는 남자아이를 골랐다.

"이게 뭘 뜻하니? 몇 번 플랫폼에서 타는지는 어디에 표시되어 있는 거지?"

"몇 번 플랫폼인지는 기차표에 적혀 있지 않아. 저기 저거 보이지? 기차 시간이 가까워 오면 저 전광판이 변하면서 플랫폼을 알려줄 거야."

열예닐곱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는 영어를 쓸 기회가 생겨 즐겁다는 듯이 수줍어하면서 성실히 가르쳐준다.

"그럼 이건 뭔데?"

"이게 좌석 번호야."

기차역의 전광판은 파리스럽다. 카드섹션처럼 촤륵 변하는 검은색 아날로그 전광판이다. 급하게 발전한 아시아와 닮아 있는 컬러풀한 디지털 전광판만 보다가 그런 것을 보니 예술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타고 갈 바욘행 기차의 정보가 올라오려면 30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이제 만사 오케이다. 그제야 배가 고파온다. 바게트 샌드위치와 콜라를 마시며 기다렸다.

대합실에 새들이 날아든다. 몽파르나스역 자체의 천장 구조가 새들이 들락날락하기 좋도록 되어 있다. 새집도 몇 개쯤은 있을 것 같은 구조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들러 개기름진 얼굴을 좀 정리하기로 하다. 화장실을 찾기가 힘들다. 물어물어 찾은 화장실은 무료가 아니다. 사람이 지키고 있는 것에서 모자라 지하철 게이트처럼 화장실 입장 게이트가 있어 동전을 넣어야 열린다. 화장실을 '관리하는'이 아니라 '운영하는'의 느낌을 받는다. 나는 동전을 넣고 엉뚱한 게이트를 끙끙 거리며 밀었다.

"거기 아니야, 옆이야."

뭐, 이런 거야 한국에서도 늘 하는 실수니까.


출발 시간이 가까워온다. 플랫폼에 들어온 기차는 내가 타고 갈 기차번호가 아니다.

'이건 뭐야?'

출발 시간 5분 전에야 플랫폼에 기차가 들어왔는데, 기차번호가 틀리다. 역무원 복장을 한 사람을 붙잡고 물어본다.

"내 기차는 어디서 타?"

프랑스어로 대답해 준다. 프랑스어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녀의 손짓으로 보건대 저 뒤로 쭉 가보라는 말인 것 같다. 복작거리는 사람들을 제치고 급히 걸어갔더니 가치 뒤에 또 다른 기차가 정차해 있다. 한 플랫폼에 기차가 2대 들어온 것이다. 어머, 이렇기도 하구나.

출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올라타고 있다. 프랑스의 가치 시간은 플랫폼에 도착하는 시간을 의미하나? 사람들이 천천히 다 탄 후에, 그러니까 10여분이 훨씬 지나서야 출발했다.


바욘역까지 5시간 걸린다. 푹 자면 된다. 기차가 늦게 도착해서 환승할 생장행 기차를 놓치게 되면 기차역 측에서 택시를 대절해 주거나 버스로 보내준다는 글을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보았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계획을 세우면서 제일 걱정스러웠던 부분이 바욘에서 생장행 기차를 갈아타는 것이었다. 어느 시간대의 기차표를 봐도 환승 시간이 많아야 10여분 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시간대의 기차표는 환승에 6분이 주어졌다. 한국에서도 6분 안에 못할 것 같은 일을 말도 안 통하는 프랑스에서 어찌하랴 싶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 같은 고민을 한 사람이 또 있었나 보다. 검색을 하니 관련 글이 몇 올라왔다. 바욘역은 작기 때문에 그 시간이면 환승이 가능하고도 남는다고 했다. 기차에서 내려 터널처럼 생긴 길을 나오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몇 번 돌리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사실 나는 반대편으로 가서 버벅거렸는데도 시간이 충분했다.

생장행 기차로 갈아타고는 창 밖 경치를 보느라 잠을 잘 수 없었다.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에 벌써 행복해진다.


생장에 밤 9시에 도착. 크레덴시알(credencial, 순례자 여권)을 발급해 주는 곳은 아직 열려 있다. (크레덴시알은 이 길을 걷는 자들을 위한 여권이다. 이 길 위의 순례자 알베르게는 다른 숙박업소보다 저렴한데, 걷는 자들에게만 제공된다. 숙박하는 곳마다 크레덴시알에 스탬프를 찍어주는데, 그게 이 길을 걷는다는 증거가 된다.) 순례자 여권을 발급해 주는 곳이 문을 열어둔 시간까지는, 숙소를 못 구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모른다면, 숙소를 예약해두지 않은 상태에서 밤늦게 낯선 나라에 도착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 않겠나. 유럽의 밤 9시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환함인데, 밤 9시 도착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기차가 밤에 도착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많은 여행객들은 일부러 야간기차를 타고 아침에 생장에 도착한다는 글을 여럿 읽었다. 그 편을 추천해 주는 블로거들도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밤 9시 도착에 겁을 먹고, 야간기차를 예매하려 했다. 야간기차 쿠셋은 몇 층이 편할까도 막 궁리했다. 그런데 그날의 야간기차는 2번 환승해야 했다. 자다가 시간 맞춰 일어나 2번 환승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아침에 도착해서 피레네를 바로 넘는 것보다 밤에 도착해서 비행기의 여독을 풀고 다음날 걷는 것이 더 이상적이기도 하다. 밤에 도착하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고 생장 숙소를 검색하던 중에 순례자 사무실이 10시까지 열려 있더라는 글을 발견했다.


크레덴시알을 발급받고 12유로짜리 알베르게를 소개받는다. 늦었지만 샤워도 하고 빨래도 한다. 그런 후에야 저녁 먹으러 나갔다. 다들 오늘 영업이 끝났단다. 술을 파는 곳만 몇 군데 열려있다. 맥주 한잔으로 허기를 면하고 잠든다. 배는 고팠지만 편히 잘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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