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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넘었다는 그 피레네 산맥

가장 기대가 컸던 피레네 산맥 넘기

by 김동해 Jan 25. 2024

2012년 8월 20일 월요일

날씨 : 정말 멋진 햇살, 점차 따가운 해살로 변함

걷기 : 생장피드포르(St.Jean Pied de Port)에서 론세스바예스(Roncevaux)까지(27.1km)


잘 만큼 자고 느지막이 눈을 떴다. 부엌으로 내려가 아침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좀 살펴본다. 12유로면 아침이 포함된 것일까? 함부르크에서 왔다는 카이에게 물어본다. 아닐 거란다. 어쩔 수 없다. 빈속으로 일단 출발한다. 발걸음은 가볍다. 가방은 조금 무겁나? 덜 마른 옷을 넣었더니 수분만큼 더 무거운 것 같다.


생장의 건물들은 참 예쁘다. 하얀 외벽에 모서리 부분만 돌벽돌로 장식해 놓았고, 빨간 지붕에 빨간 덧창이다. 그런 통일감 있는 집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 예쁜 그림 같다. 국경을 넘고서도 프랑스와 가까운 스페인 시골에는 이와 유사한 양식의 집들이 한참 동안 보인다.


'아침 요기 거리를 좀 사야 하는데.....' 

문을 연 상점이 하나 보인다. 냉큼 들어간다. 뭐 좀 먹을 만한 거 없냐고 묻자, 바게트 빵에 하몽이나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 뿐이란다. 뭘 넣을 건지 물어본다. 스페인은 하몽이 유명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몽."

하몽은 훈제한 돼지 뒷다리 살이다. 종이처럼 얇게 썰어 바게트 빵에 끼워 준다.


물도 한병 있고, 빵도 하나 있고. 뭐, 이 정도면 점심때까지는 충분하지 않겠나 싶다. 그러나 이것은 처참한 오산이었다.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할 때까지는 점심을 먹을 만한 마을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오리손(Orisson)이 있긴 했다. 겨우 8km 걸은 후에 나타난 오리손은 아침 커피라면 모를까 점심을 먹기에는 일러도 너무 일렀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읽었던 몇몇 경험담에서는 피레네 산맥을 넘는 동안 물과 먹을 것을 챙기라는 당부가 없었다. <가방이 무겁지 않아야 한다! 최소한의 것만 챙겨라! 여분은 필요 없다!>가 세뇌되었을 뿐이다. 오늘의 목적지 론세스바예스까지 주구장창 산길일 줄이야!


피레네 산맥은 이 길 전체를 통틀어 내가 가장 기대한 코스였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사진들을 몇 보았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피레네의 풍경이 기대한 만큼 감동적이었나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이국적인 풍경이긴 했으나, '환상적이다'는 아니었다. 한국의 산들이 가진 울창한 아름다움이 내게는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피레네 산맥에는 나무가 깡그리 없다. 계속 푸른 초원이다. 초록의 누드 같달까. 고스란히 드러난 둥그스름한 곡선들이 글래머 한 여성의 몸매를 보는 듯하여 아름다운 것이라고나 할까. 분명, '나폴레옹이 넘었다는 바로 그 피레네 산맥을 내/가/ 넘는다!'는 감성적 만족감은 대단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죽거나 길을 잃는 사람들도 있단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은 나폴레옹루트와 우회루트가 있다. 한참을 걸어도 경사가 높아지는 것 같지 않아 우회로로 와버렸나 슬쩍 의심이 든다. 쭈뼛쭈뼛 느리게 걷고 있는데 아이 넷씩을 가진 두 가족이 걸어온다. 

"이 길이 나폴레옹 길 맞아?"

자기들도 피레네 산맥을 걸으러 가는 길이며 '이 길이 맞다'라고 확인해 준다. 

두 가족은 며칠 전 같은 숙소에 머물며 알게 되었는데, 아이도 넷이고, 아이들의 나이대도 비슷하여 며칠간 같이 여행을 하고 있단다. 어쩜 그런 인연이! 산티아고까지 걸어갈 생각은 아니고 피레네를 구경하고는 돌아간단다. 

"너는 어디까지 갈 계획이니?"

내가 산티아고까지 걸을 계획이라고 하자 "우와!"하고 감탄해 준다. 평지가 끝나고 산길 경사가 시작되자 그들의 걸음이 느려져 우리는 '빠이빠이'를 한다. 


내가 너무 늦게 출발해서 그런지 이 길을 걷는 사람이 몇 없다. 산길 경사로 들어서자 안개가 잔뜩 낀다. 산속 안개는 촉촉 하기가 이슬비 같은데, 그래서 머리도 옷도 조금씩 젖어간다.

축축한 바위에나마 앉아 이침을 먹고 기운 좀 내기로 한다. 하몽 샌드위치를 꺼내 한입 베어문다. 하몽과의 이 첫 대면에서 나는 하몽을 싫어하게 된다. 그 들떠릅한 맛. 스페인 하몽은 진짜 맛있으니까 꼭 먹어봐야 한다는데, 나는 하몽과 친해지지 못한다. (내가 첫날 먹은 하몽은 운이 없게도 맛없는 하몽이었겠지 하며 귀국 며칠 전에 또 한 번 하몽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남들이 다 환상적으로 맛있다고 해도 하몽과는 친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래가 목에 걸려있을 때 느껴지는 찝찔한 맛이었달까.


들떠릅한 하몽 샌드위치를 낙(樂) 없이 먹고 있는데 한국이 한 그룹이 지나간다. 처음 만난 한국인이라 참 반갑다. '샨티 대안학교'에서 왔단다. 학생 5명에 교사 1명씩 그룹을 이루어 모두 6팀이 순차적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이 길 위에서 나는 그중 5팀을 만나게 된다.)

정오가 가까워오면서 서서히 안개가 걷히더니 '이게 바로 스페인 태양이야!'를 제대로 보여준다. 나무가 없으니 그늘도 없다. 뜨거운 햇볕을 너무 받았더니 피곤하고 쓰러질 것 같아 코딱지만 한 바위가 만들어내는 그보다는 큰 코딱지 그늘에 몸을 접고 누워 잤다. 체면이고 뭐고 없다.


꼭대기쯤에 오르자 경치를 구경하기 좋은 평평한 언덕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 

'올라올 땐 몇 보이지도 않더니 다들 어디서 나타난 거야?'

나도 좀 쉬어가자. 점심때가 훨씬 지나기도 해서 남은 샌드위치를 먹는다. 내 입맛에 맞지 않는 하몽 샌드위치로는 에너지가 쏟아나지 않는다.


오리손에서 한 병 더 샀는데도, 물은 꼭 한 모금 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가 정상이면 내려가는데도 이만큼의 시간이 걸릴터인데, 환장할 노릇이다! 나를 앞질러 갔던 대안학교 학생들은 서로 물 좀 달라며 난리다. 다들 물이 바닥났는가 보다. 한 모금 겨우 남은 물을 나눠 줄 인정은 쏟아나지 않는다. '야, 너네는 젊잖아.' 못 들은 척하기로 한다. 


몇 분 올라가자 차 한 대가 와서 음료와 간단한 과자류를 팔고 있다. 빈 물통에 물도 채워준다. 공짜로! 스페인의 물 인심은 얼마나 후한지 모른다. 이탈리아에서, 석회가 든 수돗물을 먹으면 안 되는 관계로 매주 낑낑거리며 생수를 사다 나르던 것을 생각하니, 스페인의 물 인심이 더 후하게 느껴진다. 그제야 '물 좀 줄걸 그랬나? 어른스럽지 못하게 시리....' 하는 후회가 든다. 


"시원한 맥주 있냐?"

"여기 술은 안 팔아."

여기서부터 내 갈증은 시작된 것 같다. 그리고 여행 내내 따라왔다. 물로는 풀리지 않는 갈증. 어쩔 수 없지. 삶은 계란 하나와 뜨뜻미지근함을 겨우 면한 오렌지 주스를 사 먹는다. 어젯밤에 같은 숙소에서 잤던 카이도 초코스틱을 먹고 있다. 장사치는 카이와 동향(同鄉))이라 모국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장사치는 오늘 피레네를 넘은 사람들이 몇이나 되는지 나라별로 집계하고 있었는데 한국인은 몇 없다.


5시쯤에야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8시에 출발했으니 9시간을 걸었다. 생장은 프랑스고 론세스바예스는 스페인이니, 오늘 분명히 국경을 넘었다. 샘이 있던 곳이 국격이었다는 사람도 있고 론세스바예스의 성당 건물을 보며 시냇물을 건너던 순간이 국경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 따로 국경스런 경계가 없었다는 소리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는 3층 침대이고, 많은 사람들이 한방에서 잔다고 들었다. 포도주 창고를 개조했다던가, 큰 성당 건물을 개조했다던가? 그런데 화살표를 따라 찾아간 알베르게는 너무 근사하고 현대적이다. 나는 론세스바예스의 3층짜리 침대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물론 3층이 걸리길 바라지는 않았고.

새로 지은 모양이다. 그리고 10유로. 까미노길의 숙박비가 5~6유로라고 들었는데, 비싸다. 2층 침대의 위층을 배정받는다. 위층 침대에 안전가드가 없어 떨어질 것 같았고, 올라가기 힘들어 애를 먹는다. (아래 칸보다 위 칸 침대가 더 편해질 날이 올 줄을 이때는 몰랐다.)


배가 고프니 뭘 좀 먹어야겠다. 맛있어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필그림(pilgrim, 순례자) 메뉴를 주문했다. 산티아고로 걷기 순례를 하는 자들을 위해 이 길 위의 레스토랑들은 값싼 필그림 메뉴를 판다. 보통 8유로라고 들었는데, 대부분 10유로였다. 물가가 상승한 때문인 것도 같고, 이 길을 걷는 사람들 수가 늘어나면서 수요가 증가한 탓인 것도 같다. 저녁은 7시 30분에 시작되니, 앉아 기다리란다. 오는 순서대로 그냥 쭉 한 테이블에 둘러앉는다.

전채 요리로 파스타가 나왔다. 메인은 고기와 생선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이날 까르네(carne, 고기)라는 단어와 뻬스까도(pescado, 생선)라는 단어를 단번에 익힌다. 먹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하므로. 후식은 요거트를 택한다.

저녁 테이블에서 속눈썹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하비와 크리스티안을 만났다. 처음에는 이들이 팀인 줄 알았다. 크리스티안은 오십 대 아저씨로 보이고, 하비는 나와 비슷한 또래 같다. 크리스티안은 누가 들어주지도 않는데 혼자 정신없이 말을 해댔다. 

'저 치, 제정신 맞아?'

그렇지만 나는 크리스티안의 선량함이 느껴져서 단박에 좋았다. 하비와 크리스티안은 같은 스페인 사람이면서도 서로의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이 카탈루냐인이라고 했다. 책에서 읽기를 스페인 내에서도 지방에 따라 말이 많이 차이 난다고 했다.

스페인 여성 둘과도 안면을 튼다. 이들과도 하루에 걷는 거리가 비슷하여 여러 날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일주일 정도의 휴가를 끝내고 돌아가게 된다. 가끔 만나지면 반가웠는데....


첫 번째 식사 테이블은 어떤 의미에서는 중요하다. 하루 만난 사람보다는 이틀 만난 사람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 아니겠나. 식탁에서 두 시간여 먹으면서, 마시면서, 단단히 안면을 트기 때문에 길 위에서 만나지면 오랜 친구를 만난 마냥 반가운 것이다. 첫날 만난 하비와 크리스티안의 존재가 내게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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