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비리 알베르게의 저녁은 예약제
2012년 8월 21일 화요일
날씨 : 맑고 뜨거움
걷기 : 론세스바예스(Roncevaux)에서 주비리(Zubiri)까지(20.5km)
오후 2시 전에 걷기를 마치는 것이 좋기 때문에 새벽에 서둘러 출발하는 순례자들이 많다. 위도가 우리나라보다 높아서 12시에서 2시가 아니라 2시에서 4시경이 가장 뜨겁다. 그때가 시에스타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괴로움을 겪느니, 땡볕을 택한다. 주위가 시끄러워 더 잘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일어나고, 천천히 내 속도로 씻고, 반듯반듯 짐을 챙기고, 슬근슬근 출발한다. 시간에 쫓길 이유가 뭐 있나. 나는 지금 여행 중이 아닌가!
늑장을 부렸다 싶은데도 출발하려고 나오니 사위가 어둑하다. 나는 헤드랜턴이 없다. 아침 일찍부터 길을 잃어 힘 빼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 다른 출발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걷는다. 그렇지. 누군가는 오게 되어 있다. 그들은 헤드랜턴이 있다. 나는 그들 뒤를 따라 걷기로 한다.
걷다 보니 론세스바예스에서 출발하는 길은 검은 숲을 한참 지나가기 때문에 주위가 더 어둑해서 혼자 걸었으면 길을 잃는 것은 뭐 그렇다 치더라도 무서울 뻔했다. 숲은 해뜨기 전이라 날이 어두워서 검었다기보다는 나무도 나뭇잎도 시커맸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보면 게르만족이 검은 숲으로 달아나면 더 이상 좇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검은 숲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니겠나 싶다. 울창한 숲 그늘이 짙어 검은 것이 아니라, 정말 검은색 숲이 있었다.
어제의 고통을 알기에 오늘은 슈퍼가 보이자마자 들어가 사과 두 알을 산다. 생각보다 당도가 떨어진다.
어제는 계속 산길이었는데, 오늘은 자주 예쁜 마을을 만난다. 노란 화살표를 찾으며 걷다가 동영상을 촬영하는 남자를 만났다. 그의 눈에도 마을이 예뻐 보였나 보다. 그는 네덜란드인이고 이름이 페이터란다. 나도 내 소개를 했다. 그는 동해를 잘 발음하지 못한다.
"그냥, 씨(sea)라고 불러."
(그와 나의 인연은 산티아고까지 쭉 이어진다.)
어제에 비하면 오늘은 하루 푹 쉬는 거나 마찬가지다. 고통스럽게 피레네를 넘은지라, 오늘의 평지는 식은 죽 먹기다. 그래도 오늘 거리는 일부러 짧게 잡았다. 몸이 적응하도록 일주일 가량은 20km 정도만 걸을 생각이다.
오늘의 목적지 주비리에 도착했으나 알베르게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어제는 샨티 대안학교의 도열 학생이 찾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성당과 레스토랑 두서너 개가 끝인 마을이기도 해서 어려울 것이 없었다.
페이터가 어느 건물 앞에서 호객 광고를 읽더니, 아침 포함 15유로인데 어떠냐고 묻는다.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괜찮다고 한다. 알베르게 여주인은 '침대는 어떻고, 화장실은, 빨래는, 신발은....' 하면서 설명해 준다. 그녀의 설명을 대충만 알아듣는다. 어느 침대를 쓰고, 몇 시에 밥을 먹는지만 알아들으면 만사 오케이지 뭐.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이 샤워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땀 흘리며 걸었기 때문에 쿰쿰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 따끈한 물에 하루의 피로를 얼마간 씻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다음으로 긴급한 것이 빨래다. 햇볕에서 바삭바삭 말라야 내일 입을 옷가지가 생긴다.
빨래가 끝나고 예쁜 응접실에 앉아 순례자들이 두고 간 책을 뒤적였다. 한국인 누군가는 가이드북을 두고 갔다. 나는 가이드북 없이 왔던 지라, 그걸 펴놓고 가까운 며칠간의 일정을 잡아본다. (며칠 지내보니, 사실 이렇게 하는 것보다, 완전 상세하고 최신의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는 가이드북을 가진 외국인 친구들에게 물어 일정을 짜는 것이 더 편했다. 페이터를 만나게 되는 날이면 그는 내 가이드북이 되어 주었다.)
조금 걸어 남은 오후 시간은 여유 부리며 즐긴다. 마을 입구 골목 그늘에 앉아 탐스런 복숭아를 꿀떡꿀떡 씹으며 지나가는 순례자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자전거로 이 길을 가는 두 남자가 내 옆에 와 앉는다. 쉬어 가려나 보다. 많이 지쳐 보인다.
"야, 그 복숭아 어디서 샀냐?"
"어, 저기."
그들도 빨간 복숭아를 사 오더니 나처럼이나 달게 먹는다.
어느 니라 사람이고, 어디서 출발했고, 어디까지 갈 것이며, 며칠 동안 여행하는 지는 이 길 위에서의 대화의 정석이다. 우리는 복숭아를 먹으며 정석의 대화를 나눈다. 두 남자는 오늘 생장에서부터 출발해 지금 막 도착했고, 시간이 좀 이르지만 이곳 주비리에서 숙소를 잡을 거라고 했다. 피레네가 정말 힘들더라고 한다.
"그래, 나도 정말 힘들더라."
피레네는 걷는 것보다 자전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동네도 한 바퀴 둘러본다. 현대식 건물이 대부분이다. 도로는 엄청나게 넓고 곧게 닦아 뒀는데, 지나가는 차량은 별로 없다. '참으로 한적한 동넬세.' 동네 초입에 강이 흐르고 있는데, 순례자들은 발을 담그기도 하고, 수영복을 갖춰 입고 나와 물놀이를 하기도 한다. 강물 색이 어찌나 투명한지 나도 발 담그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발을 담근 순간! 나는 뜨악하고 만다. 몇 초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물은 차다. 스페인 태양은 이렇게 뜨거운데! 여름이면 빙하가 녹아 강물이 된다더니, 그 차가움은 '아, 깜짝이야!'였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물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발이 막 시리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밥때를 간절히 기다리며 스페인어 공부도 좀 한다. 걷고 난 오후에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걸으면서 연습하면 40일 후에는 스페인어 초급 정도는 되지 않겠나 하고 야무진 기대를 한다.
'열공'을 하고 있는데, 옆 침대의 이탈리아 남자가 넌 저녁을 어디서 먹을 거냐고 한다.
"여기서 먹을 건데?"
"예약했냐?"
"뭐? 예약했어야 해?"
아, 놔~. 급히 알베르게 여주인에게 저녁을 먹을 수 있겠느냐고 하니 5시까지 예약을 했었어야 한단다. 나는 7시 30분에 저녁 먹으러 식당으로 오라는 소리만 기똥차게 알아들었지, 예약하라는 소리는 못 알아들은 것이다.
"안 된다더라."
이탈리아 남자는 어디에 식당이 있는지 가르쳐준다. 자기는 한숨 잔 후에, 9시쯤 먹으러 갈 거란다. 나는 배고파서 일찌감치 저녁을 찾아 나선다.
이 동네에 수영장이 하나 있는데, 수영장 건물에 딸린 음식점에서 필그림 메뉴를 팔았다. 무려 12유로. 음식의 질을 생각한다면 12유로는 완전 사기 수준이다. 입맛에 맞고 안 맞고의 문제가 아니고, 음식의 수준이 먹는 나를 우울하게 했다. 그러나 먹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하므로 먹긴 먹는다.
혼자 울적한 저녁을 먹고 돌아왔는데, 알베르게의 식당에서는 그날의 투숙객들이 만찬을 즐기고 있다. 나이프와 포크가 분주히 접시와 부딪히는 소리, 엄청 맛있을 것 같은 냄새, 약간 흥분한 듯한 웃음소리, 그리고 빼꼼 열린 문으로 보이는 따스한 노란색 조명..... 혼자 외톨이가 된 듯한 기분이다.
"어디서 저녁 먹었니? 맛은 어때?"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이탈리아 남자가 묻는다.
"수영장 옆에 있는 레스토랑. 완전 형편없어. 넌 절대 거기 가지 마."
이날 알베르게의 저녁테이블에서 친구를 좀 더 사귀었더라면 더 풍족한 까미노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뭐,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동안은 그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걸으며 페이터가 여기저기 인사를 하는데 나는 도통 모르겠는 사람들이다. 그가 주비리의 저녁 테이블에서 만난 사람들이라고 설명해 줬다. 식사 테이블이 이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다.
어떤 알베르게는 필그림 메뉴의 가격 수준에서 투숙객들에게만 저녁을 제공한다. 이런 알베르게에서 먹은 저녁은 매번 기대이상으로 맛있었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마을이 너무 작아서 음식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서이다. 또는 아래층은 레스토랑이고 위층은 숙소인 경우에도 당연히 투숙객을 상대로 음식장사를 한다. 주비리의 이 알베르게는 마을에 음식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녁을 제공했는데, 이것은 이 동네 레스토랑의 음식이 먹을 만한 것이 못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밤에 꿈을 꾼다. 괴롭게 잠꼬대를 하다가 내 목소리에 놀라 퍼뜩 깬다. 아무도 못 들었기를...... 그들에게는 생소할 한국어로 신음하는 듯한 잠꼬대를 들으면 완전 희한할 것이 아닌가. 엄마가 꿈속에 나타나 나를 서럽게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근심을 일단 털고 가도록 하는 꿈이 아니었나 싶다. 한국에서의 내 최대의 스트레스는 '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