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페르민 축제가 열리는 빰쁠로나
2012년 8월 22일 수요일
날씨 : 맑고 더움
걷기 : 주비리(Zubiri)에서 빰쁠로나(Pamplona)까지 (21km)
거의 꼴찌로 일어나 아침을 먹으러 내려간다. 알베르게에서 준비한 아침은 그렇게 품위 있을 수가 없다. 마실 것으로는 커피, 차, 주스, 우유까지 다양하고, 빵도 따끈따끈하게 데워서 내왔다. 그 빵이 입맛에 안 맞을까 봐 카스텔라와 비스킷까지 내놨다. 거기에 버터와 두 종류의 쨈. 그것도 모자랄까 봐 우유에 섞어먹는 시리얼까지. 이렇게 단정하고 푸짐한 아침은 이 길 위에서 다시 먹어보지 못했다. 분명, 어젯밤 만찬은 환상적이었으리라.
길에서 카이를 다시 만났다. 생장에서 같은 숙소에 머물렀던 독일 청년이다. 카이는 완전 해골처럼 생겼다. 저 몸으로 어떻게 이 여행을 나섰을까 싶을 정도다. 눈은 움푹 들어갔고, 다크서클은 혓바닥처럼 늘어져있다.
"카이, 너 힘들어 보인다."
"그래, 나는 좀 피곤해. 너는 아침보다 더 신선해 보인다. 네 땀은 다 어디 갔니?"
그의 말에는 시샘이 어려 있다. 해가 머리꼭대기에 올라왔으니 가장 더울 때고 가장 지쳐있을 때인데, 카이가 보기에 내가 너무 생생해 보인 것이다. (사실 그렇기도 했다. 피레네를 넘던 첫날을 제외하면, 처음 일주일은 쌩쌩 걸었다. '나 걸음이 이렇게 빨랐나?' 나도 놀라면서. )
오늘의 목적지 빰쁠로나는 인구 얼마의 큰 도시란다. 숫자 뒤에 '0'이 세 개 붙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0'이 4개 붙는 것부터는 어떨 때는 알겠다가 어떨 때는 모르겠다. 페이터는 도시의 규모를 인구가 얼마인지로 이야기해 주는데, 나는 도통 느껴지지 않는다.
도시 내에서 화살표를 찾기가 더 힘들다고들 한다. 과연 그랬다. 화살표가 없어서라기 보단 - 그런 경우도 가끔 있긴 했지만 - 눈길 가는 것이 많아서 한눈팔다가 화살표를 놓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도시 깊숙이 들어왔는데 공원에서 화살표가 사라진다. 대신 도시의 높은 표지판 기둥에 알베르게 방향을 알려주는 팻말만 걸려 있다. 빰쁠로나에는 얼마 전에 지은 새 공립 알베르게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표지판에 적힌 알베르게 이름은 내가 수첩에 받아 적은 그것이 아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알베르게를 어떻게 찾을지 고민하고 있자니, 저기 다리를 건너오는 크리스티안과 하비가 보인다. 어찌나 반갑던지!
"동해, 여기서 뭐 하니?"
"알베르게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너네는 어디로 가는데?"
하비는 알베르게 무니치팔(albergue municipal, 공립 숙소)에 갈 거란다. 네가 가려는 곳이 '헤수스 이 마리아(Jesus y Maria)냐고 물어보니 방향을 바꿔 자기들도 그곳으로 가겠단다. (빰쁠로나에는 공립 알베르기가 2개 있다. '헤수스 이 마리아'는 최근에 문을 연 곳으로 시설이 매우 깨끗하다.)
"아하! 그러면 네가 찾아. 난 네 뒤꽁무니를 따라가겠어!"
하비는 스페인 사람이라 화살표를 무시하고, 물어서 알베르게를 찾는다. 처음으로 큰 도시다 보니, 알베르게를 어렵게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헤매느라 빰쁠로나를 다 구경해 버렸다는 이도 있었다. 나는 스페인 사람 하비를 앞세워 알베르게를 간단히 찾았다. 나의 잔머리란!
셋이 나란히 침대를 배정받는다. 좀 크레이지 한 크리스티안과는 아래위로 눕게 되었고, 내 바로 옆 침대를 하비가 배정받는다. 내가 쭈뼛거리고 있자 크리스티안이 자신의 위 칸과 바꿀 생각이 있냐고 물어본다. 그의 뉘앙스는 '다 너를 위해 내가 바꿔주려는 거야'를 위장했다.
"왜, 아래 칸이 더 편한 거 아니야?"
크리스티안이 그런 줄 알면서 내가 젊은 남자 하비와 나란히 눕게 된 것을 어색하니까 농담을 한 것이었다.
"치, 그냥 아래칸 쓸 거야."
론세스바예스의 위층 침대의 불편함이 아직 기억에 뚜렷하거늘..... 피 끊는 젊은 남자가 옆 침대를 쓴다고 한들, 이런 것은 전혀 신경 쓸 대목이 아니었지만, '여행자'의 자아보다 '동양 여자'의 자아가 더 세던 때라......
배가 너무 고파 씻자도 않고 땀 냄새를 풍기며 혼자 뭔가를 먹으러 간다. 알베르게를 돌아 나와 어느 성당 앞에 있는 음식점이었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젊은 여자 종업원은 영어를 못한다. 나는 스페인어를 못한다. 그래서 이태리어를 써본다. 그것도 뭐 그렇게 잘 통하는 것 같지 않다. 필그림 메뉴가 되느냐고 물어보는데, 그녀는 '꼬미다'만 반복했다.
'아, 뭔 소리야?'
(며칠이 지나서야 '꼬미다(comida)'가 '음식'인 줄을 알게 된다.)
식당 앞에 세워둔 입간판의 '메뉴 델 디아(Menu del Dia, 오늘의 메뉴)를 시켜볼까 싶다. 필그림 메뉴가 아닌 걸 처음 먹자니 뭘 주문해야 할지 모르겠다. 필기체로 갈겨져 있어, 읽기가 쉽지 않다. 그녀가 오더니 메뉴를 쭉 나열하다. 파스타가 언뜻 들린다. "빠스따." 메인 요리는 뭘로 할 건지 물어본다. 뻬스까도가 언뜻 들린다. "뻬스까도는 안 돼. 까르네 부탁해. 후식은 사과." "후식은 이따 주문해."
올리브 오일로 무친 파스타와 야채는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스페인에서 먹어본 전채 요리 중 최고였다. 메인 요리의 정체는 아직도 모르겠다. 닭고기라고 치기에는 가는 뼈가 너무 많았고, 닭다리라고 하기에는 생김새가 너무 컸다. 맛은 닭고기 같았지만 약간 더 퍽퍽했다. 내가 뭘 먹은 걸까?
스페인 사람들은 광장이 내다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점심을 먹는다. 난 참 그 느릿함에 적응이 안 되어 있었던지라, 음식 접시가 나가고 다음 접시가 들어올 때까지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좀 막막했다. 관찰하는 것이 취미긴 하지만, 동양인 여자 혼자 앉아 식사하는 모습이 관찰당하기 더 좋은 대상이어서, 뒤통수가 당겼다.
길에서 가끔 만났던 이탈리아 여자가 나를 알아보고 다가오더니, 여기 맛있냐고 묻는다. 그들도 늦은 점심을 먹을 만한 맛난 음식점을 찾고 있나 보다.
"진짜 맛있어. 난 전체 요리로 파스타샐러드 시켰는데, 환상적이었어."
그녀는 일행과 새 테이블을 잡고 앉는다. (며칠 후에 알게 되는데, 그녀는 스페인 사람이었다. 내가 자기를 이탈리아 여자로 알고 계속 이탈리어로 말해서 그냥 뒀다는 것이다. 어쩐지! 알아듣는 정도가 좀 뜨문뜨문하다 싶더라니.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는 비슷한 단어가 좀 있기도 하고, 옆 동네다 보니 간단한 회화 정도는 서로 알아듣는다.)
그녀는 보육원 교사고, 일주일의 휴가 동안 일부 구간만 걷고는 돌아간단다. 한국의 크기와 인구에 대해 궁금해하기에 스페인이 4배 정도 크지만 인구는 비슷한 것으로 안다고 대답해 줬는데, 제대로 된 정보를 준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스페인이 올해 너무 가물었었다며 스페인이 사막화되어 간다고 걱정을 했다.
맛있는 점심을 배불리 먹고 나니 너무 행복하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부른 배를 문지르며 샤워하고 빨래를 마친다. 알베르게 뒤편 공터에 빨래를 널면 햇볕이 순식간에 말려주겠는데, 건물 밖에 빨래를 널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붙어 있다. 경고문에도 불구하고 어떤 빨래는 널려있다. 소양 있는 유럽 애들이 저랬을 리가 있나. 내가 경고문을 잘못 이해한 건가 싶어 물어본다.
"이건 이 건물 밖으로 빨래를 들고나가지 말라는 거 아니야?"
호주에서 온 아줌마가 자기도 밖에 널었단다.
"난 아무것도 안 본 걸로 할게."
그러니, 너도 가져다 널라는 것이다. 햇볕이 저렇게 좋은데, 저기다 안 널면 어디다 널겠냐면서. 아, 유쾌한 아줌씨 같으니! (그러나, 며칠 뒤 그녀는 내가 이 길 위에서 만난 가장 불쾌한 사람이 된다.)
빨래를 끝내놓고, 덥거나 말거나 빰쁠로나를 헤집고 다닌다. 처음으로 큰 도시에 왔으니 지도에 나타난 광장이란 광장은 모두 구경할 작정이다. 가장 더운 시에스타 시간에는 문을 닫는 상점도 많고, 거리가 갑자기 한산해진다.
광장에서 주비리의 알베르게에서 내 위층 침대에서 잤던 르나타를 만난다. 그녀 일행은 새 알베르게가 있는 줄 모르고 오래전에 지어진 공립 알베르게에 들었단다.
"그런데, 너 어젯밤에 나쁜 꿈 꿨나 보더라. 막 중얼거리더라."
아, 누군가는 들어버렸구나.
시에스타 시간에는 땀 흘리며 열심히 헤집고 다니고, 해 질 녘이 되어서는 숙소로 들어와 쉴 모드를 취한다. (빰쁠로나 이후로는 시에스타 시간과 관광시간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감이 잡힌다.) 크리스티안과 하비가 맥주 마시러 같이 가겠냔다.
"물론이지. 나 맥주 너무 좋아해."
둘은 저녁을 먹을 것이 아니라 간단한 걸 먹을 거란다. 나도 4시에 점심을 먹어서 간단히 먹겠다고 한다.
크리스티안과 하비는 영어를 완전히 못한다. 겨우 단어 몇. 소통이 어렵지만 즐겁다. 크리스티안과 하비의 나이를 정확히 들었는데 잊어버렸다. 크리스티안은 나보다 열 살 정도 더 많고 하비는 나보다 한두 살 어린것으로 기억된다.
크리스티안은 바르셀로나에서 뭔 상점을 운영한다고 한다. 결혼은 안 했지만 같이 사는 여자도 있고 그 여자가 데리고 온 아이들도 있단다. 하 참, 이런 건 완벽히 이해되는 대목이 아니다.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니까.
하비의 직업은 가드너란다. 가드너라면 정원사? 하비의 품격 있는 속눈썹을 보면 그 직업이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가드너(gardener)?"
내가 가드너라는 단어를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기계로 잔디 깎는 시늉을 한다.
"넌 예술가처럼 생겼는데?"
하비가 낄낄 웃더니, 얼마 전까지는 음악을 했단다. 어느 그룹에서 기타를 친다던가, 건반을 만진다던가.
"와우, 내가 오늘 유명한 사람을 만난 거네?"
하비, 또 낄낄.
"네 음악을 들어볼 순 없을까?"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찾아질 거라며 그룹 이름을 적어준다. 페이스북에서는 'ESTRES'로 찾으라고 했고, 인터넷에서는 'GANYAHMUN'으로 검색하라고 했었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야 그때의 메모가 기억나서 찾아봤다. 진짜 그의 얼굴이 있다. 짜식, 뮤지션이었어!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하비다.) 난 녀석을 좀 바보스럽게 봤더랬다. 하비가 낄낄 거리며 웃으면 많이 그래 보인다.
하비는 지금 '단짜 데 드라고네스(Danza de dragones)'를 읽고 있는 중인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다고 또 낄낄거린다.
"그게 뭔데?"
보여주겠다고 하더니 서점 쇼윈도에 진열된 책을 가리킨다. 딱 봐도 판타지 소설이다. 중고딩 여학생들이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읽는다면 남학생들은 딱 이런 판타지 소설을 읽겠다 싶은 표지를 하고 있다. 한국에 돌아가면 꼭 읽어보란다. 지금 몇 권까지 밖에 안 나왔는데 다음 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단다.(우리나라에는 '드래곤과 춤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크리스티안과 하비가 한 광장에서 멈추더니 팔을 이리 뻗었다 저리 뻗었다 한다. 결국은 지나가는 사람을 세워 뭘 물어본다. 빰쁠로나 사람이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손짓하며 설명해 준다.
"왜? 뭔데?"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황소몰이를 한다는 것이다. 빰쁠로나는 산페르민 축제가 열리는 도시인데, 이 광장이 바로 투우장으로 황소를 몰고 지나가는 그 유명한 광장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광장이! 크리스티안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디를 다녀가는지도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 낮에 시내를 싸돌아 다니면서 투우경기장을 보고서도 생각이 산페르민 축제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이런 멍청함이 있나! 가이드북이 없는 탓이다. 아쉽기도 하지만 가이드북을 살 생각은 안 한다. 이렇게 주워 들어가며 얻는 정보가 더 실감 나지 않느냐고 합리화하며 가방이 조금이라도 무거워지는 것을 지극히 경계한다.
1차는 하비가 계산한다. 맥주 두 잔, 신알코올 한 잔에 무려 10유로. 멋진 광장 주변은 1.5배 비싸다. 두 번째 바에서는 맥주와 하비가 고른 삔초(Pincho, 안주)를 먹는다. 이번에는 크리스티안이 계산한다. 맥주 두 잔, 와인 한 잔, 삔초 세 개에 10유로. 가격 정말 착하다. 얘들 하는 짓이 완전 동양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치페이를 안 한다. 자기들은 좀 더 마실 건데, 너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까짓것, 나도 한잔 더 하지 뭐.
세 번째 바는 참으로 흥미롭다. 테이블은 이미 꽉 찼고, 스탠드에 서서 먹는 사람으로 빈틈이 없다. 하비는 구석 스탠드에 자리 잡고는 얼른 의자 하나를 구해와 나를 앉혀준다. 웨이터는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구분해서 계산서를 작성하고 주문을 받는지 모르겠다. 한 웨이터의 재바름과 총명함이 아직도 기억난다. 웨이터는 주문을 받고 계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문한 음식을 장만하고 서빙까지 했다.
내가 바게트 빵 위에 작은 오징어가 얹힌 삔초를 골랐더니 그들도 맛있어 보인다며 같은 걸로 주문한다. 서양인들이 오징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크리스티안은 빰쁠로나와 관련된 자신의 과거를 들려준다. 빰쁠로나 아가씨와 사랑한 이야기다. 쉰도 넘은 아저씨가 사랑타령. 역시 크리스티안은 크레이지 하면서도 순수한 구석이 있다. 3차는 한잔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잔씩 더 마신다. 나는 취기가 올라와 멈춘다. '걷기'가 최고의 목적이므로 '걷기'를 과하게 방해할 짓은 삼가게끔 된다. 25유로나 나왔다. 동양적인 이 분위기도 좋지만 내가 25유로를 다 내면 좀 삥 뜯기는 기분이 아니겠나. 내가 기쁘게 낼 수 있는 만큼만 낸다. 하비가 나머지를 채운다. 술이 조금 취해 돌아온다.
'이 집에서 한잔, 저 집에서 또 한잔' 하는 스페인의 술 문화를 나는 바(bar) 순례라고 부르겠다. 바 순례를 스페인 사람으로부터 단 삼일째에 배우게 된다. 신알코올(sin alcohol, 무알콜), 삔초(pincho, 안주)라는 단어도 배운다. 신알코올이 무알콜인 것을 나중에 알게 되는데, '술을 마실 거면 마시고 안 마실 거면 말 것이지, 알코올 없는 술은 왜 먹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