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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 1일째, 松山文創園區

by 김동해

오늘은 나의 첫 자원봉사일이다. 늦을 수 없잖아? 지각하지 않으려고 엘리베이터에서도 걸었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도착했더니, 된장, 시간이 바뀌었단다. 주말에는 3교대로 편성하다 보니, 12시에 신청한 것이 1시 30분으로 조정되었단다.

‘왜 나한테 알려주지 않은 거예요?’

12시에 도착하려고 11시가 조금 넘어서 집을 나서느라 때도 안된 시간에 점심을 먹었고, 지각할까 봐 열나게 걸은 탓에 땀범벅이 되었단 말이지. 나는 봉사 활동을 통해서 분홍빛 만남도 기대해 보는 것인데, 땀에 폭싹 젖어서 몰골은 형편이 없고, 냄새까지 푹푹 나서야 어디.


1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하니, 그동안 송산문창원구(松山文創園區)를 좀 둘러봐도 좋겠지만, 봉사자 옷을 입고서 관광객 놀이하기가 좀 멋쩍었다. 사실 나는 얼굴 두껍게 관광객 놀이를 할 있다. 하지만 밖은 너무 덥다. 그냥 봉사자 센터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송산문창원구(松山文創園區)를 대만 사람들은 송옌(松菸, 송산담배)으로 부른다. 이곳에 일본 강점기 시절에 지어진 담배 공장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 담배 공장은 길쭉한 사각형 창고형 건물이 5동 연이어 있는데, 이런 대규모 행사를 하기 딱 좋은 공간인 것 같다. 행사가 없을 때는 창고거니하고 비워두면되겠고, 행사가 있을 때는 행사의 성격에 맞게 세팅을 수 있도록 완전 텅 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번 2025 월드마스터즈게임에서는 1번 창고는 비행기 수속대처럼 검열대를 차려놓고 참가 선수들 안전 검열을 했고, 2번 창고에서는 선수등록을 받았고, 3번 창고에 자원봉사자 센터가 차려졌다. 박람회는 4번 창고와 5번 창고에서 나눠서 열렸다.


봉사자들은 도착해서 출석체크를 해야 하고, 마치고 갈 때도 귀가체크를 해야 한다. 30분 이상 늦으면 출석체크가 안된다. 시간이 되면 책임자가 와서 봉사자들을 각각의 자리에 배치해 주고 뮐 해야 하는지 설명해 준다. 봉사 신청을 해놓고, 두 번 이상 결석하면, 더 이상 국제급 행사의 봉사활동에 참여할 수 없단다.


나는 한국어 통역봉사를 신청했는데 이곳 책임자가 하는 말이, 한국인은 이 행사에 거의 안 와서 한국어 통역은 딱히 필요 없고, 일본인은 제법 많은데 하신다. 어쩔. 나 지금 쓸모없음을 당하는 거야? 이런 건 자원봉사를 와서는 참 당할 수 없는 경험인데?

'그럼 통역봉사자가 쓰이도록 잘 배치를 했어야죠!'

2003년 대구에서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열렸을 때는 각 나라의 스포츠 팀 별로 통역 봉사자를 붙여줬다. 나는 이탈리아 축구팀을 배정받았는데, 이탈리아 축구 선수들은 영어를 거의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한국에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때의 존재감이란! 그런데, 오늘 나는 좀 잉여적 존재가 된다.


나는 박람회 문 앞에 서서 행사 안내 겸 홍보하는 업무를 받았다. 주최 측은 방문자가 2025 월드마스터즈게임 박람회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2025WMG(#2025雙北世界壯年運動會)라는 문구와 함께 올리면 작은 선물을 주는 것으로 이 행사를 홍보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번 박람회가 어땠냐 하는 것에 대한 설문조사도 했다. 나를 포함해서 세명의 통역봉사자는 박람회 입구에서 방문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사실 소리를 친 건 아니다.

"인증숏 올리고 선물 받아 가세요! 설문조사해도 선물드려요!"

나 말고 두 사람은 주로 영어권 방문객을 상대하고, 나는 중국어로 대만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이것 말고도 우리의 또 하나의 임무는, 2025 월드마스터즈게임 박람회에 온 방문자에게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기념 카드를 나눠주는 일이었다. 기념 카드에 여섯 개의 스탬프를 다 찍으면, 이번 대회의 마스코드 쭈앙 빠오(庄寶)가 나타난다. 쭈앙빠오(庄寶)는 한자(漢字) 북(北)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캐릭터로 살찐 한자漢字) 북(北) 같은 동글동글한 모습이다. 몸 반쪽은 분홍색이고 반쪽은 파란색이다. 머리에는 번개가 디자인된 붉은 스포츠 해어밴드를 하고 있다. 나는 이게 박람회 전시관 안에 있는 어떤 활동에 참가하고 스탬프 하나씩 받아서 완성시키는 줄 알았다. 자원봉사를 하는 중에 살짝 자리를 비우고 내가 직접 해봤는데, 전시관 곳곳에 스탬프 찍는 곳이 마련되어 있어서, 그냥 찍으면 되는 거였다. 6개의 스탬프가 어찌 섬세하게 잘 만들어져서, 하나하나가 더해져서 카드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오, 멋져 멋져!'

박람회를 보러 오는 누구든 손짓으로 불러서는 기념카드를 나눠주고, 박람회를 둘러보면서 6개의 스탬프를 찍으면, 이번 대회 마스코트를 만들 수 있다고, 해보라고, 재밌다고, 카드가 너무 이쁘지 않으냐고 유혹했다. 나는 사람들이 재밌게 즐기길 바랐다.

"아무것도 안 하고 쭉 들어갔다 쭉 나오면 재미없다고요! 가서 최소한 스탬프 찍어 모으는 것이라도 해봐요. 재밌다고요."

"이걸 다 하면 뭘 주는데요?" 어른 방문객은 이렇게 되물었다.

"아무것도 안 줘요. 그냥 당신의 기념품이 되는 거예요. 6개의 스탬프를 다 찍고 나면 너무 예뻐요!"

내가 만든 기념카드를 보여주면, 어떤 사람은 너무 예쁘다며 자기도 해보겠다며 기쁘게 카드를 받아가고, 어떤 사람은 시시하다며 그냥 가버렸다. 어른들은 대체로 작은 선물을 준다는 인증숏과 설문조사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렇게 재미난 걸 왜 안 해보지?'

많은 어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나서는 요령이 생겨 아이들만 불러 세워 카드를 나눠줬다. 한 장을 받아갔던 아이가 자기 형에게도 주게 한 장 더 달라고 하면 '거봐, 거봐, 내가 정말 재밌다고 했잖아.'의 심정이 되어 기뻤다. 한 할아버지는 아주 수줍게 카드를 한 장 달라고 했다. 한 아이는 제 엄마가 설문조사 하는 걸 지겨워하며 기다리면서도 내가 카드를 건네자 나른하게 필요 없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꼬마의 이 대조적인 모습을 보면서, 나이가 들어도 호기심이 있으면 아이일 수 있고, 애라도 만사 귀찮아하면 늙다리일 수 있구나 싶었다. '나는 절대 마음이 늙지는 않을 거야.'하고 다짐을 했다.


내가 배치되었던 4번 창고에는 월드마스터즈게임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는 전시와 이번 대회에서 치러질 35가지 게임에 관한 설명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매시간마다 가이드가 방문객들을 데리고 다니며 설명해 주는 활동이 있었다. 나는 또 잠시 관광객이 되어 가이드의 설명을 따라다녔다.

박람회 전시의 첫 구역은 월드마스터즈게임의 역사에 관한 전시였다. 세계마스터즈게임은 1985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최되었고, 3, 4, 5년 간격으로 개최된다. 개최되는 간격이 들쭉날쭉한 것은 올림픽과 같은 해에 개최되지 않기 위해 일정을 조정하거나, 해당 국가의 준비 상황을 배려하다 보니 그렇단다. 100세에 가까운 선수가 참여한 경우도 여러 차례 있단다. 그들이 참가하는데만 의미를 둔 게 아니고, 메달까지 따갔단다.

'우와!'

나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대단한 노익장이잖아 싶어 놀랐는데, 훗날 그 메달이 어떻게 온 건지 알게 되고는 좀 김이 빠졌다.

세계마스터즈대회는 2022년에 일본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로 인해 개최되지 못하면서, 대만이 아시아 최초 개최국이 된다. 코로나로 미뤄졌던 것은 2027년에 다시 일본에서 개최된다.

그다음 전시코너에는 이번에 참가한 선수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게 나눠주는 선물팩에 뭐가 담겨 있는지 전시해 놨다. 자원봉사자들에게는 선수들에게 없는 마스코트 쭈왕빠오(庄寶) 빼지가 있다!

'내 가방 안엔 없던걸?'

"이 빼지는 자원봉사자들에게 특별히 주는 거라서,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가이드가 이렇게 설명한다.

'어, 그럼 난 갖고 싶잖아.'

나는 나중에 2개나 갖게 된다.

그다음 전시는 대만에서 개최되는 35개 스포츠 항목에 대한 설명이었다. 월드마스터즈대회에는 8명이 한 팀이 되어서 상대와 겨루는 ‘줄다리기’ 종목도 있고, 수영해 가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인명 구조' 종목도 있고, 지도를 보며 나침판으로 방향을 찾아 매 지점을 찍고 목적지까지 누가 빨리 도착하나를 겨루는 '오리엔티어링(Orientieering)이라는 종목도 있었다.


지원한 건 한국어 통역 봉사였는데, 나는 오늘 한국인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통역 봉사를 지원하면서 상상한 그림은 경기장에서 게임을 하는 한국인 선수들을 위해 멋지게 통역해 내는 존재감 있는 장면이었는데 말이지.

이때는 몰랐다, 그래도 이 날이 제일 재미있고 할 일 있는 보람찬 날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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