台北小巨蛋
대만은 돔형으로 생긴 경기장을 샤오쥐딴(小巨蛋), 따쥐딴(大巨蛋)으로 부른다. 쥐딴(巨蛋)은 거대한 계란이라는 뜻이다. 샤오쥐딴(小巨蛋)은 작은 거대한 달걀, 따쥐딴(大巨蛋)은 큰 거대한 달걀이라는 뜻이다. 나는 맨 처음에 이 이름을 듣고 쥐딴(巨蛋)이 돔형 경기장이라는 게 참 매치가 안 됐다. 거대한 공룡알이면 모르겠는데, 계란은 어떻게 거대해져도 돔형 경기장을 표현하기에는 좀 가소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샤오쥐딴(小巨蛋)은 스포츠 경기와 문화 공연을 위한 다목적 실내 경기장이다. 주로 농구, 배구, 배드민턴, 권투, 아이스하키, 피겨 스케이팅 등 다양한 실내 스포츠 경기가 열린다. 따쥐딴(大巨蛋)은 지붕이 있어서 비가 와도 경기를 할 수 있는 실내 야구장이다. 가끔 다른 경기도 하지만 주로 야구 경기가 열린다.
오늘 봉사온 곳이 바로 타이베이 샤오쥐딴(小巨蛋)이다. 자원봉사사 센터도 당연히 실내인데,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있어 시원하고, 테이블과 의자가 갖춰져 있어 연속 근무를 하는 자원봉사자들이 거기서 식사를 할 수 있다. 일찍 도착한 나 같은 사람이 앉아 쉴 수도 있고.
나는 오늘 출입구에 배치됐다. 출입구는 선수들과 관객들이 안전검사를 받고 입장하기 때문에, 아주 가끔 통역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인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한국어 통역인 나는 오늘도 쓸모가 없을 예정이다. 오늘도 앉아 주말에 있을 가이드 시험공부를 했다. 대부분의 자원봉사자들은 서서 응대를 했고, 나처럼 편하니 앉아 제 집인 양 제 할 일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 모양새는 좀 날라리 봉사자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 일이 없는 걸 어째. 서서 멍 때리며 4시간여를 흘려버릴 수는 없는 일이잖아?'
공부를 하고 있자니, 또 한 명의 언어 봉사자가 왔다. 이 여대생은 사실 운동선수 약물검사 통역을 신청했었는데, 오늘은 약물검사가 없을 거라며 나처럼 출입구에 버려졌다. 그녀는 쭈빗쭈빗 서서 뭔가 자기가 도울 일이 없을까 기다렸다.
'거기 서 있어봤자 할 일이 없다구.'
내가 와서 앉으라고 권했다.
"저분이 이미 영어 통역을 맡고 계세요. 우린 딱히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와서 앉아요."
그녀도 날라리 기질이 있었던지, 다른 자원봉사자들과는 달리 앉기를 거부하지 않고 제깍 와서 앉았다.
"약물검사 통역은 용어가 좀 전문적이지 않아요? 통역하기 어렵지 않아요?"
"그래서, 미리 관련 용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왔어요. 제가 통역을 못해서 대회 진행에 지장을 주면 안 되니까요."
"하하, 성실한 봉사자네요. 난 여기 와서 이렇게 농땡이 부리고 있는데."
짧은 대화를 끝내고, 그녀는 핸드폰을 보고 나는 또 내 공부를 했다. 내 공부는 관광 가이드 2차 구술시험을 준비하는 것이라, 핸드폰으로 대만 관광지에 대한 자료를 찾아 노트에 마인드맵을 그려나갔다. 출입구에 서서 영어 통역을 맡고 있던 내 또래 비슷해 보이는 여인이 슬쩍 와서 보더니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말을 붙인다. 그녀는 한국에 관심이 많고,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안다. 우리가 수다 꽃을 피우고 있자니, 샤오쥐딴(小巨蛋) 총책임자까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출입구에는 자원봉사자고 책임자고 할 일이 이렇게 없었다는 소리다.) 그녀도 한국을 좋아한다. 한국과 관련된 자신의 온갖 추억을 일방적으로 쏟아낸다.
'아, 이 대화, 피곤한걸.'
그녀가 말을 잠시 멈춘 틈을 잡아, 화재를 돌렸다.
"여기 딱히 할 일도 없는데, 경기 좀 보고 와도 돼요?"
책임자는 그러라며, 이렇게 저렇게 가면 된다고 길을 알려준다.
"자기도 같이 가요." 내가 여대생에게도 권했다.
"그래도 되는 것일까요?" 여대생은 조금 멋쩍어한다.
같이 수다를 떨던 두 여인도 권하니 그제야 못 이기는 척 나를 따라나선다.
오늘 이곳에서는 유도경기가 열리고 있다. 나는 유도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모른다. 보고 있자니 어떤 경기는 시작하자 말자 바로 끝나고, 어떤 경기는 오래도록 한다. 유도 경기는 어떻게 해서 승부를 가르는 것인지 여대생에게 물었다.
"등 전체가 닿으면 져요. 그러면 게임은 끝나요."
"저건 왜 저런 거예요?"
"등 전체가 아니라 측면만 닿은 거잖아요. 그럼 점수를 한 점 따고, 경기는 계속돼요."
"저건 또 왜 저래요?"
"아무도 점수를 못 땄지만, 우측이 공격수가 많았기 때문에 판정으로 이긴 거예요."
"젊은 아가씨가 유도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요?"
대만에는 양용웨이(楊勇緯)라는 선수가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일로, 유도 경기는 대만인들이 애정을 가지고 보는 종목이 되었단다.
"그만 일로 대만 사람들이 다 유도를 좋아한다고요?"
"양용웨이(楊勇緯)가 대게 잘 생겼거든요."
내게 사진을 찾아 보여주는데, 정말 연예인급으로 생겼다. 운동선수이니 탄탄한 몸매야 말하지 않아도 알 테고, 순진하게 웃는 얼굴은 사람을 참 유혹하게 생겼다.
나도, 한국인에게는 유도가 어떤 느낌인지 이야기해줬다.
"남자 둘이 엉겨 붙어서 업치락 뒤치락하는 장면이 끈적한 배경 음악과 함께 나오면 어떤 줄 알아요? 야할 수 있어요. 한국에 그런 광고가 있었거든요. 오늘 유도를 현장에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유도는 내게 좀 에로틱한 느낌을 줬더랬어요."
여자 선수의 경기가 시작됐다. 독일선수와 대만선수가 맞붙었다. 독일 선수의 아들은 경기장이 떠나가도록 독일어로 뭐라 뭐라고 외쳤다. 아마도 '엄마 파이팅!'이었겠지. 남자아이인지 여자 아이인지, 완전 꼬만지 초등학생쯤 된 건지 멀어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로 보건대 어째 유치원도 안된 아기 같았다. 그 꼬마 혼자 자기 엄마를 응원하는 소리가 온 체육관을 메웠다. 그 엄마는 아이가 목이 터져라 응원하니 이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 결승전까지 올라와서 메달을 땄다.
근무 장소로 돌아오자, 조금 전에 같이 수다를 떨었던, 한국을 좋아하는 두 여성이 또 다가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공부를 더 하기는 글렀군.'
공부를 포기하고는 경청자가 되어주기로 한다. 한국을 좋아한다지 않나! 여행을 갔다가 김치를 깜빡 잊고 안 실어온걸 내내 안타까워 있다고 하지 않나! 한국 스포츠계의 지원이 대만보다 월등이 낫다고 부럽다 하지 않나!
'한국인에게 한국 이야기를 하고 싶은 그녀의 말를 좀 들어주자!'
우리는 마지막으로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녀들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지만, 사진은 당일의 수다를 기억나게 할 것이다. 내심 귀찮았지만, 좋은 한국인 이미지를 위해 의무심을 발휘했던 그 대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