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머리 같애

그로부터 시달린 하루

by 김동해

2012년 8월 30일 목요일

날씨 : 산 중에서 잠시 비를 만남, 고지가 높아서 그랬던지 바람이 쌀쌀

걷기 : 벨로라도(Belorado)에서 아게스(Ages)까지 (27.8Km)


아침에 눈을 뜬다. 김양호 씨보다 일찍 출발하길 바라며 서둔다. 김양호 씨도 서둔다. 간밤에 잤던 식당에서 아침을 제공해 줘서 빵에 잼을 발라 먹는다.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카페꼰레체도 만든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도 나와 잘 속도를 맞추는지 모르겠지만, 나보다 딱 한 발만 늦도록 보조를 맞춰 내가 하는 일을 따라 한다. 어정대본다. 김양호 씨도 보조에 맞게 어정댄다. 그를 떼버리기는 힘들겠다 싶어 어정대기를 포기하고 출발한다.

그는 간밤에 벌레에 물려 잠을 잘 수 없었단다. 벅벅 긁어대다가 도저히 그 가려움을 견디지 못해 오밤중에 찬물샤워를 했단다. 자다가 누군가가 씩씩거리며 굵어대는 소리를 들었었다. 참을 수 없이 간지러운 것인지, 인내심이 도통 제로인 것인지, 같은 방에 자는 다른 사람까지 근질거리게 느껴지도록 긁어댔었다. 그 자가 바로 김양호 씨였구나.

나는 침대 벼룩이 무서워 되도록이면 창가에 있어 밝고, 바람이 통하는 침대를 택했었다. 이런 주의를 기울인 덕에 아직은 벌레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아침을 잔뜩 먹었으니 바에 들러 뭘 먹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예쁜 풍경이 내 발을 잡지도 않는다. 걷고 또 걷는다. 앞서 걷는가 싶었던 김양호 씨가 어느 바에서 불쑥 튀어나오더니 커피를 한잔하고 가란다. 내가 오는지 어떤지를 지켜보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안학교 학생들도 있으니 마시고 가란다.

'커피를 마시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지.'

아니, 나는 하늘이 꾸물거릴 때, 뜨거운 햇살을 피해 빨리 산을 넘고 싶으므로 쉬지 않겠노라 하고 걸음을 서둔다.


오늘은 해발 2000미터가 조금 못 되는 산을 하나 넘게 된다. 출발지인 벨로라도가 이미 800미터였기 때문에 완전한 산행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경사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산을 넘기 전에 있는 마지막 마을에 도착한다. 대안학교 학생들은 오늘 이곳에서 1박을 하고, 내일 아침에 산을 넘을 계획이란다.

일단 산에 진입하면 먹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뭔가 먹을거리를 사들고 풍경이 예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 벤치에 앉아 배를 채우고 있자니, 저 아래 김양호 씨가 급히 올라온다. 걷기 힘들어하던 혜인이의 배낭을 들고 왔다.

혜인이는 산 아래서 잘 것이었기 때문에 자기 배낭을 찾으러 언덕 위로 어그적 어그적 올라와야 했다. 그가 언덕 아래까지 배낭을 내려줄까 하며 해인에게 묻는데 내 눈치를 슬쩍 본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어느 여학생을 도와줬다는 말에 심성 한번 캡짱 고우시다고 지극한 찬사를 보냈었지. 그의 눈빛은 또 그걸 바라는 듯. 배낭을 내려줄까 어쩔까 하며 그가 설을 푸는 새, 해인이가 언덕을 올라와서 배낭을 가져간다.

김양호 씨는 자기 배낭을 내 옆에 풀어놓더니 뭘 먹고 가야겠단다. 내가 같이 먹으러 갈 줄로 알았을까? 아니면 먹을 걸 사들고 올 때까지 내가 배낭을 지켜주며 기다릴 줄 알았나? 나는 그의 배낭과 함께 앉아 기다려줄 마음이 조금도 없다. 나는 먼저 간다며 산으로 진입한다. 그가 제발 따라오지 않기를 바라며.


산은 깊다. 좀 무섭다. 산이 깊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가 따라와 해코지할까 두려운 것이다. 그를 '거머리 같다'라고 여긴다 하여 이 산 중에서 나를 어찌하는 것은 아닌지 막 두렵다. 누군가 나타나기를 바라며 속도를 낸다. 경사를 오르면서도 힘든 줄도 몰랐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므로. 그러다 프랑스 부부를 만났다. 내가 허벅지에 통증을 느껴 절뚝거리던 날, 걱정해 주고 먹을 것도 나눠주던 부부다. 어찌나 반갑던지. 죽지 않겠다는 안도감이 확 든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도 간간히 있다. 순례자들을 몇 만나고 나니 더 이상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지는 않으나 그를 떼어버리고 싶은 열망은 크다. 누군가 뒤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가 따라온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며 뒤를 돌아봤다.


꼭대기에 올랐다 싶은데, 비가 솔솔 뿌리기 시작한다. 시원해서 그냥 맞으며 걷는다. 빗발이 순식간에 굵어진다. 비옷을 꺼내 입는다. 내 비옷은 분홍색이라 기분이 좋아진다. 비가 그친듯하여 비옷을 벗는다. 또 비가 와서 다시 입는다. 비가 오지 않을 때 비옷을 입고 있으면 덥기 때문에 입었다 벗었다를 하는 것이다. 비옷을 타고 빗물이 제법 뚝뚝 떨어진다.

스페인은 이 계절에 비가 적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 오는 날씨에 대한 장비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 오로지 신발 하나만 고어텍스다. 비옷도 등산용 비옷이 아니라서 모자가 작아 캡모자가 고스란히 젖는다. 그래도 뭐 빗속을 혼자 걸으니 기분이 좋아져서, 목이 마르지도 않으면서 더 기분 좋으려고 빨간 복숭아를 꺼내 먹는다. 과일은 나의 '엑스터시'다.


산 너머에 있는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에 도착한다. 오래된 건물이 근사하다. 그러나 일단 배부터 채워야겠다. 바를 찾은 그 순간, 김양호 씨가 뒤에서 소리친다.

"엄청 빨리 왔네요?"

따라잡기 힘들었다나 뭐라나. 누가 날 따라잡으랬나? 미친다!

나는 뭘 좀 먹어야겠다며 바로 들어간다. 그도 따라 들어온다. 밑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하더니 먹지 않았느냐고 하자 먹지 않았단다. 내 앞에 턱 앉더니 자기가 슈퍼마켓에서 사 온 먹을거리들을 나눠준다. 무거워서 가져가기 힘드니 마음만 받겠다며 거절한다.

그는 배낭을 내 옆에 풀어두고 얼른 슈퍼마켓에만 갔다가 내 뒤를 부리나케 쫓은 것이다. 그가 따라올까 두려워하며 죽을힘을 다해 걸어왔으니, 그의 걸음으로도 내 뒷모습을 좀체 다라잡지 못한 것이다.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봤다. 알따뿌에르까(Altapuerca)까지 간단다. 내 목적지 아게스(Ages)보다 3km 더 가야 나오는 마을이다. 다행이다. 자기 입으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내가 머물 숙소에서 또 따라 자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가 먼저 출발하기를 바라며 꾸무덕댄다. 화장실도 두 번씩이나 들락거렸다. 바에서 나왔더니 그가 아직도 있다. 나는 성당을 좀 둘러보고 가겠다며 또 늑장을 부린다. 천천히 참으로 천천히 성당을 둘러본다. 앉아 기도도 한다. 또 나와서는 오르테가의 풍경을 보느라 뒷걸음질로 천천히, 천천히 걸었다.


산 후안 오르테가의 하늘은 특별히 더 예쁘다. 오래된 성당 건축물의 실루엣 뒤로 가벼운 구름이 바람에 흐른다. 지금껏 스페인 하늘에 걸린 조막만 한 구름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바람을 못 느끼며 걸었다는 뜻이다. 구름이 흐르는 것이 보기 좋아 성당 십자가 뒤로 보이는 하늘을 보고 또 봤다. 사진으로 한 장 남겼으면 좋겠는데, 카메라가 또 먹통이다. 된장, 어쩔 수 없다. 머릿속에 담자.

이렇게 아름다운데도 이곳에서 자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어느 블로그에서 오르테가 알베르게에 묵었다가 베드벅에 물렸다는 글을 보았는데, 글쓴이는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이라고 했다. 그래서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며칠 전부터 하루의 거리를 계산할 때 오르테가를 피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았다. 베드벅이 아니더라도 지대가 높아 밤에는 추웠을 것이다. '피하길 잘했다.'


오르테가를 벗어나 얼마 되지 않아, 멀리 김양호 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엥? 이제껏 거길 갔어? 아, 미친다. '너를 거머리로 임명하겠다.'이다. 도착이 늦어지거나 말거나 아무 데라도 앉아 하염없이 쉬어버리고 싶지만 바람이 불어 너무 추웠기 때문에 걸어야 했다.

언덕에서 오늘의 목적지 마을을 내려다보자니 골목에서 기다라고 있는 티가 역력한 그가 보였다. 왜 그럴까? 혼자 알베르게를 잡지 못하나? 아님 아직도 나를 요리사로 생각해서 자기 친구들이 있는 곳까지 나를 운반해갈 생각인가?

정작 마을까지 내려왔더니 다행히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바보가 아니면 알았을 텐데, 하루 종일 거머리 짓을 한 이유가 뭐야?

그로부터 시달린 하루.


아게스의 알베르게에서 페이터를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했더니 자기도 그렇단다. 저녁은 페이터와 필그림 메뉴를 먹는다. 그는 생선을, 나는 소고기를 주문했다.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는 굉장히 맛있었다며 까마레라(camarera, 여종업원)을 불러 칭찬 겸 감사를 전한다.

페이터가 자기 부인 이야기를 한다. "외롭던 어느 날 바에 갔지. 스탠드에 홀로 앉아 술을 마셨지. 고개를 돌렸더니 춤추고 있는 그녀가 보였어. 같이 춤을 췄지. 그리고 결혼을 했지."

그가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보여주며 '손'이라고 한다. "손이 뭐야?" 사진 속의 남자 얼굴을 보자, 내 머릿속에는 페이터의 남동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손(son, 아들)'이라는 단어를 못 알아듣는다. 그가 두 아이를 가진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상황을 이해한다. 사진 속의 남자는 부인이 데리고 온 아들이었는데, 페이터만큼이나 늙어 보였다.

그는 어떤 사연으로 두 아이를 가진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는 행복할까? 그는 정적이고, 표정이 크지 않아서 얼굴에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기분이 어떤지 짐작하지 못하겠다. 이 여행은 먼저 이 길을 걸어본 부인의 권유로 하게 되었단다. 부인이 프랑스까지 같이 와서 생장까지 차로 태워다 주고 갔단다.

네덜란드 가장은 집집마다 커피머신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커피머신 고치는 일을 한단다. 그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드라이버로 커피머신 여는 모습은 좀 상상이 되지 않았는데,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커피머신을 고친다'라고 표현했다.


자면서 약간 춥다고 느낀다. 날씨의 완전 변신. 9월로 다가가면서 날씨가 변해가는 것도 맞고, 오늘 머무는 곳의 지대가 높은 때문이기도 하다. 아게스는 해발 900미터에 있는 마을이다. 앞으로 2주 가까이 해발 800미터 이상의 고원지대를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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