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을 만나다

광주 청년

by 김동해

2012년 8월 31일 수요일

날씨 : 아침에는 완전 서늘했고 바람도 차갑게 불었다. 낮에는 뜨거움

걷기 : 아게스(Ages)에서 부르고스(Burgos)까지 (22.5km)


아침에 또 꼴찌로 출발한다. 다들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나 움직이나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깜깜한 새벽에 걷기 시작한다. 나는 햇볕을 사랑하니까 문제없다. 아침 날씨가 쌀쌀하다.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바람막이 점퍼를 꽁꽁 여며 입는다.

어디선가부터 페이터와 함께 걷고 있다. 오늘은 지금까지 만난 도시들 중에 가장 큰 도시에 도착할 예정이다. 페이터는 또 인구 몇의 도시라고 설명해 준다.

'그렇게 설명해 주면 난 몰라.'

부르고스(Burgos)라는 표지판을 본 지 두 시간이 넘도록 알베르게가 나타날 생각을 않는다. 도시가 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서로 길게 들어선 도시여서 더 그랬던 것이다.

긴 도시를 걸어 들어오느라 힘들었다. 말없이 묵묵히 가는데, 페이터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는지. "너 혼자서 걷고 싶니?" 한다.

"나는 너와 함께 걸으면서 혼자 걷고 있어.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우리는 여러 차례 함께 걸었고, 오늘처럼 별말 없이 걸었었다. 힘이 들어 내가 얼굴을 찌푸렸나? 그걸 보고 페이터는 자기를 불편해한다고 생각했나? 페이터! 절대 그렇지 않아! 아무 짓 안 하고도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이 능력은 뭐란 말인가.

지금껏은 우리 둘이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면서 같이 걸어왔다면, 도시에서는 나란히 걷는다.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 시골길에서는 얼마간의 속도 차이라도 지평선 전에서 그의 뒷모습이 잡히지만, 도시에서는 몇 걸음 차이라도 건물 속에 가려 놓치게 된다.


동서양인이 나란히 걷고 있으니 스페인 할아버지가 말 한번 걸어보고 싶으신가 보다. 할아버지가 다가와 스페인어로 물었고, 나는 스페인어로 답했다. 아디오스를 외치고 돌아서서 나는 호들갑을 떨었다.

"페이터, 참 신기하지? 나, 스페인어가 완벽하게 들렸어!"

"그래, 그런 것 같더라."

스페인어로 완벽한 대화를 한 그 기분을 잊을 수 없다. 물론 문장이 아니라 단어로 답했을 뿐이지만.


부르고스의 도시외곽을 거의 다 빠져나와 번화가로 접어든다 싶을 때였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김양호 씨가 뒤에서 나를 부른다. 완전 어이없어진다. 그는 나보다 앞선 마을에서 출발했을 테고 이 길을 걸으면서 한 번도 그의 뒷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사람으로 가득해서 같이 가던 사람의 뒤통수도 놓치겠는 복잡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진 것이다.

그는 알베르게를 못 찾아 도심을 헤매고 있었단다. 세고 센 것이 순례자인데, 그는 왜 하필 내가 나타날 때까지 이 길목을 헤매고 있었단 말인가.

"우리도 지금 찾고 있어요. 같이 갑시다."

페이터와 내가 앞서 나란히 걷고, 그는 삼각형의 꼭짓점을 찍듯 바싹 붙어 뒤를 따라온다.

드디어 까떼드랄(cadedral, 중심가)로 들어선다. 까떼드랄의 좁은 골목 바닥은 돌 벽돌로 되어있는데, 세월에 자연스럽게 마모되어 현대에 있으면서 중세의 느낌이 났다. 각양각색의 상점들이 들어서있어 순례자들은 진열장 너머를 구경하며 느릿느릿 걷는데, 그 순례자들의 배낭 물결 속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난다. 포도를 나눠줬던 브라질 청년이다. 알베르게가 다 차버릴 수도 있으니 빨리 가보란다. 안 돼!

페이터와 나는 인포메이션에서 일단 지도부터 챙겼다. 도시가 크다 보니 지도도 너무 크고, 골목도 너무 많고, 나는 알베르게 방향도 잘 모르겠다. 페이터는 지도를 잘 봤다. 유럽 사람들은 다 그런가, 아님 남자들은 다 그런가? 페이터는 오늘 호텔에서 묵으면서 하루 푹 쉬어야겠다고 했는데, 공립 알베르게 가는 길을 찾고 있다.

"페이터, 넌 호텔 가. 나, 지도 보면서 찾을 수 있어. 걱정 마."

"아냐, 같이 가자."

그가 공립 알베르게에 들었다가 결국은 호텔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서야 들었다. 고마운 페이터.

나는 이백 몇 번의 침대를 배정받는다. 알고 보니 사백 명 넘게 수용하는 큰 알베르게였다. 지금껏 지나온 알베르게 중에 이렇게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곳은 없었다. 브라질 청년은 자기가 받은 침대 번호를 보고 곧 알베르게가 다 차버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빨래를 널러 나왔더니 한국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계신다.

"어머 한국분이시죠?"

그녀는 아킬레스건이 아파 4일째 이 알베르게에서 꼼짝을 못 하고 있단다. 아킬레스건이 탈 난 날, 5시간이면 걸을 길을 14시간 걸려서 도착했단다.

"아주 죽을 뻔한 거지."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 병원에 갔는데, 상담받는데만 80유로였단다. 아프면 절대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팍 든다.

하루만 더 쉬고 버스로 레온으로 가서, 거기서부터 다시 걸을 계획이란다. 빠듯한 일정 안에 순전히 '걸어서' 산티아고까지 갈 거라고 초반에 무리를 했단다. 일주일 딱 걷고 나서 탈이 나버렸단다. (나는 탈이 날 것까지 생각해서 43일을 잡았는데, 하루도 탈 나지 않고도 딱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이건 내 경우고, 어떤 젊은이는 20일 만에 이 길을 완주하기도 했다.)

부르고스에서 엄청 구경하리라 생각했으나, 나는 누워 잠시 끼적거리다 자는 쪽을 택한다. '발바닥의 아픔이 사라진 후에 구경하자.' 누구나 이 길을 '걸어서' 완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구나. 나영이도 맹장수술로 여행이 끝나버렸고, 오늘 만난 그녀도 여행의 중단을 맞는구나. 나는 '완벽하게 걸어서 완주'하고 싶다. 중도에 아파서 버스를 타거나 해서 '완벽'에 흠나는 것이 싫다. 쉬자.


부르고스 대성당은 유명하다. 그곳부터 구경을 간다. 공립 알베르게에서 화살표를 따라 조금만 걸으면 대성당의 뒤태가 보이고,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대성당의 정면으로 안내된다. 나는 성당 내부를 보는 일에는 욕심이 없어서 입장료가 있는 경우에는 굳이 들어가 보지 않았다. 그게 유명한 부르고스 대성당이라도. 부르고스 대성당은 지금껏 본 성당 건축물 중에 제일 크고 화려하다. (산티아고의 성당에 비하면 쨉도 아니었지만, 이때는 그 정도 화려함으로도 '우와!' 했다.)


큰 도시에 왔으니 별렀던 쇼핑을 한다. 충전용 건전지를 사러 갔다. 마누엘이 적어준 대로 '필라스 레까르가블레스'라고 말했다. 점원이 두 종류를 들고 오더니 이건 얼마고 저건 알만데, 기능이 이렇고 저래서 가격 차이가 난다고 설명해 준다. 나에게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며 싼 것을 권해준다. 한번 충전하면 800장 정도 찍을 수 있고, 한 30번 충전해 쓸 수 있단다. 충전을 얼마나 여러 번 해서 쓸 수 있느냐에 따라 가격이 비싸졌다. 충천용 건전지가 충전만 하면 영원히 쓸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것도 소모된다는 것을 알았다. (부르고스부터는 맘껏 사진을 찍게 된다. 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느냐고 핀잔을 들을 만큼.)

사전이 없는 것도 좀 답답했다. 스페인어가 늘지를 않았다. 아이 손바닥만 한 것이지만 무게 걱정을 하면서 사전도 '과감히' 사버렸다.


저녁시간까지 기다리기에는 배가 너무 고프다. 맥주 한잔 마실 것이라고 안주가 맛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닌다. 홍합 메뉴 전문점을 발견한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해산물이냐며 반갑게 들어간다. 홍합에 토마토소스가 발라져 나왔다. 좀 짜다. 그런데 가만 보니 다른 테이블에는 빵도 준다. 그렇지, 빵이랑 함께 먹어야 간이 딱 맞겠다. 나는 왜 빵 안주냐고 컴플레인해서 빵을 받아냈다. 바텐더 녀석 나쁘다!


부르고스를 누비다 알베르게로 돌아온다. 오랜만에 만난 도열에게 저녁 먹으러 갈 때 이 아줌마도 같이 가자고 부탁해 놓는다. 순례자로 가득한 도시에서 혼자 먹고 싶지 않아서다. 한국인 누나와 형을 만나 그들과 함께 저녁 먹기로 했단다.

"아줌마도 껴도 되는지 물어봐주렴."

대안학교 학생들, 새로 등장한 아가씨와 청년, 그리고 김양호 씨까지, 이렇게 대규모로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 새로 등장한 청년이 부르고스를 잘 알아서 그가 맛있고도 싼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기로 한다. 이것저것 읊다가 중국요리로 결정을 본다.

8인용 식사를 시켰더니, 중국요리가 종류별로 끝도 없이 나왔다. 배속에 거지가 들었을 남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도 음식이 남았다. 스페인은 더운 날씨 때문에 음식이 대체로 짠데, 중국 요리마저도 짰다. 그러니 물이 쓰인다. 스페인에서는 음식점에서 물을 시키면 병째 나오고 비용이 청구된다. 새로 등장한 청년이 물은 돈 주고 사 먹을 필요 없다며, '운 바소 데 악꽈(un vaso de aua, 물 한잔)'를 가르쳐준다. 이렇게 청해서 나온 물은 가격에 포함되지 않는다. 까미노를 걸으면서 유용하게 써먹었다.

그의 억양에서 전라도를 느낀다. 그렇지, 광주 사람이란다. 자지러지게 반가워한다. 내 잠재의식에 뭐가 깔려있는지 전라도 말씨에는 무조건적인 호감이 인다. 광주 청년은 이 길을 5년 전에 이미 걸었고, 올해는 노르떼(norte, 북) 길을 다시 걷고 나서, 이 길을 걷다 만난 친구 집을 방문하가 위해 부르고스에 왔단다.

그는 악수를 청하며 "동갑입니다. 반갑습니다." 한다. 그의 얼굴은 너무도 앳돼 보여서 '동갑'이 '당신과 나이가 같습니다.'로 들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고 있는데 그게 자기 이름이란다. 이름을 듣는 순간 상대에게 각인되는 힘은 그의 희한한 이름 덕일 것 같지만, 그의 탁월한 정교화 능력 때문이다. '짜식이 귀엽네.'

배가 부르니 만족스럽다. 그런데 밤바람은 상당히 차다. 긴 바지에 바람막이 점퍼까지 입고도 벌벌 떨며 알베르게로 돌아온다. 반팔 티에 반바지, 맨발에 샌들을 신은 도열은 새파랗게 되었다.


동갑과 김양호 씨는 알베르게의 자판기 맥주로 한잔 더 할 거란다.

"누님, 맥주 한잔 하시죠."

그는 나보다 서너 살 아래였는데, 나를 바로 '누님'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를 '동갑님'이라고 부른다.

새로 등장한 아가씨의 이름은 지연이다. 대안학교 학생들을 챙겨주고 그녀도 내려왔다. 누군가가 술안주로 해바라기 씨앗을 내오고, 맥주 캔은 하나에서 둘로, 셋으로 늘어간다. 동갑님이 자기 인생이야기를 짧게나마 풀어놓는데, 나는 그의 진실성이 느껴져 "그래서요?"를 연발하며 이야기를 재촉한다. 김양호 씨는 '나, 이런 사람이다'를 내보이고 싶어 이것도 저것도 아는 척 나서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럴수록 깊이 없는 그의 내면이 뽀록날 뿐이다.

동갑처럼 매력적인 청년을 만나다니 오늘은 정말 행복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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