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를 휴지통에 버렸을 때

그를 싫어하게 된 지점

by 김동해

2012년 8월 29일 수요일

날씨 : 변함없이 맑음

걷기 : 산토도밍고 델 라 깔사다(St.Dominggo de la Calzada)에서 벨로라도(Belorado)까지 (23km)


어젯밤에 팬티에 검은 피가 묻어 나왔다. 약간 걱정이 된다. 출발 며칠 전에 생리를 시작해서 거의 끝나갈 때 비행기를 탔었다. 지금은 끝난 지 10일도 넘게 지났는데, 다시 피가 비친 것이다. (스페인에서 40여 일을 머물렀으니 걷는 중에 한 번은 생리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3주가 지나고서야 생리를 시작했다. 무리하게 걸어서 몸이 놀라긴 놀란 것이다.)

늦었다 싶어 겨우 몸을 일으키니 7시가 다되어간다. 스테파니와 대안학교 학생들에게 7시에 아침을 주기로 했다. 그래서 일어났다. 그랬지 않았다면 더 오래 누워 있었을 터. 바게트 빵을 오븐에 정성스레 구워 버터를 바르고, 오렌지 잼을 바른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유럽의 버터 맛인가. 환상적이다. 요거트, 오렌지 주스, 키위까지 먹고서야 일어선다.

오스피탈레로는 새로운 날을 맞이할 청소를 한다고 분주하다. 이것은 빨리 나가라는 신호다. 아침을 먹고 보니 우리가 제일 꼴찌다. 출입문 옆에 벗어둔 신발을 찾으러 갔을 때, 나와 김양호 씨 것만 딸랑 남아있었다. 2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묵었을 터인데, 어떻게 꼴찌를 할 수 있었나 몰라.

오늘은 벨로라도(Belorado)까지 간다. 23km쯤 걷게 된다.


김양호 씨는 아침부터 나와 동행했다. 오늘의 목적지 벨로라도에 도착해서 알베르게를 고를 때까지. 마을 입구에서 만난 첫 번째 알베르게에는 만국기가 내걸려있고 요란한 광고판이 호객한다. 나는 이 알베르게가 마음에 안 든다. 마을 안에, 교구에서 운영하는 조그마한 알베르게가 있어 그곳으로 맘을 정한다. 김양호 씨도 따라 들어온다.

오스피탈레로가 시원한 물부터 한잔 주는데, 진짜 고맙다. 내게 스페인 포도 맛을 보여줬단 브라질 청년도 와있다. 무척 힘들다고 했더니, 알베르게에 막 도착하는 순례자들은 다 그런 것이라고 위로해 준다. 그는 그 말을 해주면서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저녁 테이블에서 한국요리를 조금 나눠주며 포도 이야기를 했더니, 그때야 알아보고 반갑게 웃었다. 이렇다니까. 서양애들은 동양인 얼굴을 잘 기억 못 한다. 그들에게는 얘가 쟤 같고, 쟤가 얘 같다. 나는 그의 준수한 얼굴과 느끼함에 완전 반해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김양호 씨는 잠은 여기서 자고, 저녁은 자신의 패거리들이 묵고 있는 첫 번째 알베르게로 가서 한국요리를 해 먹잖다.

그는 오늘에서야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는데, 그가 따라다니던 외국인 패거리 앞에서 보여주던 사람 좋아 보이고, 친화력 있어 보이던 얼굴은 간 곳이 없다. 피곤하고 약삭빠른 한국인 아저씨의 얼굴이다. 내 입에서도 그를 부르는 호칭으로 '아저씨'가 대번에 튀어나왔다.

아침, 바에서 내 커피 값을 낸다고 할 때부터 귀찮아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요리사로 모셔가겠다고 종일 내 뒤를 밟을 줄은 몰랐다. 같은 알베르게에서 만나지면 한국음식을 해먹을 수도 있겠거니도 아니고, 꼭 그리해야겠다고 내 뒤를 밟은 것이다. 오, 마이 갓!

그는 걸음이 굉장히 빠르다. 하루에 40km는 장난이다. 내 걸음에 맞추는 것은 그로서도 짜증스러운 일이다. 나도 귀찮고 그도 짜증스런 일을 그가 한다.

오늘 아침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아침거리로 산 버터, 잼, 빵 등이 남았다. 적당히 나눠 가진다. 버터는 가져가면 녹으니까 다음에 올 사람들을 위해 냉장고에 남겨두고 가자고 했다. 그는 버터를 가져갈까 말까 하다가 결국은 챙긴다. 신발을 신으러 내려가서는 마음이 바뀌었는지 버터를 두고 가야겠단다. 나는 그 말이 냉장고에 두고 오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 웬걸. 그 멀쩡하고 아까운 것을 일각의 고민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나는 원래 상대의 말보다 사소한 행동으로 사람을 판단하는데, 이런 행동은 내 기준에 '삐!'하고 걸리는 행동이다.

'난 이 사람이 싫다!'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하러 뒤뜰로 간다. 그가, 배가 고프니 일단 뭘 같이 먹잔다. 나는 그와 뭘 같이 먹을 생각이 조금도 없다.

'혼자 가서 드세요.'

내가 왜 여행까지나 와서 싫은 사람과 밥을 먹어야 해?

"전 일단 햇볕 좋을 때 빨래부터 할게요."

그는 내가 빨래하는 사이 시내를 한 바퀴 돌아 햄버거를 둘 사 온다.

"따뜻할 때 하나 드세요."

그가 햄버거를 내밀며 보여주는 그 눈빛,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비열함, 싫다! '너 혼자 드시고 너 갈길 가세요.'이다. 그러나 나는 그걸 받아먹는다. 내 코 앞에다 디미는 것을 무슨 명분으로 거절하리. "난 네가 주는 거 먹기 싫거든."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뒤뜰에 앉아 열홍쌤과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또레스 델 리오에서는 한방에 머물렀고, 어제도 같은 알베르게에 있었지만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다. 그는 인도에서 몇 년간 봉사활동을 한 인연으로 대안학교의 교사로 일하고 있단다. 그리고 이 길을 걷는 것이 처음이 아니란다. 그럼 앞으로 나타날 마을에 대한 정보를 좀 달라고 했더니, 인도 봉사활동을 가기 전에 걸었던 이 길에 대한 기억은 깡그리 지워지고 없단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차근차근 걸은 길을."

인도에서의 경험이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이란다. 인도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대안학교에 대해 느낀 바를 솔직하게 말해버린다. 부정적인 거라면 너무 솔직하게 뱉어내지 않기로 했는데, 또 말해버렸다. 그런 식의 솔직함을 고치기로 하지 않으셨는가? "그대는 참 마음에 드나, 앞서 보았던 두 교사들이 이래 저래서 마음에 들지 않았노라."라고 말할 필요가 뭐가 있었더란 말이냐.


저녁은 열홍쌤의 학생들과 한국요리를 해 먹기로 한다. 정현의 생일날에 돼지불고기를 맛있게 먹었다는 소문을 들었단다. 그래서 오늘의 메뉴도 그걸로 정한다. 저녁 장을 보러 나간다. 김양호 씨는 자기가 요리할 것도 아니면서 이걸 해 먹자니 저걸 해 먹자니 말이 많다. '네가 요리하실 것이 아니면 그냥 좀 계시오.'이다.

내일은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 따라오며 어쭙잖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싫다. 웃음 가득한 얼굴과 웃음이 싹 가진 얼굴의 차이란! 친화력이 아니라 그의 말 그대로 '생존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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