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의 첫걸음은 시외버스 안에서 시작됐다
(브런치북 표지: Unsplash의De an Sun / 1화 커버: Unsplash의Miom _0326)
2015년 6월부터 나는 격주 일요일마다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새벽에 일어나 오전 7시 버스를 타면 서울에 12시쯤 도착했다. 번역 수업은 2시에 시작했다. 4시나 5시쯤 수업이 끝나면 저녁을 먹고 오후 7시 버스에 올라 부산에는 자정 무렵 도착했다. 왕복 10시간을 버스에서 보내며, 몇 개월 동안 이렇게 서울을 오갔다.
당시 나는 사회복무요원이었다. 군 복무를 대체하는 공익근무로, 평일에는 부산의 한 관공서에서 일했다. 월급은 20만 원이 채 안 됐다. 주말만이 온전히 내 시간이었다. 그 귀한 주말을 버스 안에서 보내는 게 아깝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아깝기는 했다. 하지만 가고 싶었다.
번역을 배우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문 번역가가 되고 싶어서 수업을 들은 건 아니었다. 그런 거창한 꿈은 없었다. 그저 내가 속한 사회운동 단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단체 활동을 하면서, 조용하고 내향적인 나는 괜히 주눅이 들곤 했다. 다들 뭔가 잘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제안이 왔다.
단체 내부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었다. 번역자 양성 프로그램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중요한 외국 기사와 논문을 번역해서 회원들과 공유하고 간행물에 반영해야 하는데, 번역자가 부족하다는 거였다. 번역 경험이 없어도 괜찮다고 했다. 함께 글을 돌려보고 토론하며 배울 수 있다고. 지방 회원들도 적극 자원해달라고 했다.
나는 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학 전공은 영어는커녕 어문 계열도 아니었고, 번역과는 아무 관계 없는 전공이었다. 그래도 단체 내에서 다른 회원들에 비해 내가 그나마 잘하는 건 영어인 것 같았다. 단체에 기여할 방법을 찾던 나에게 딱 맞는 제안이었다.
문제는 수업이 서울에서 열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사회복무요원 복무 때문에 휴학하고 본가가 있는 부산에 살고 있었다.
처음엔 망설였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왕복하려면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 20만 원이 채 안 되는 월급으로는 빠듯했다. 시외버스가 가장 값싼 방법이었다. 모집 공고에는 “지방 회원도 스캔과 인터넷, 전화로 소통 가능하다”라고 쓰여 있었지만, 나는 그게 현실적이지 않다는 걸 알았다. 제대로 배우려면 직접 가야 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가자. 일단 가보자.
수업을 위해 일요일 아침 7시 버스를 타려면 새벽 5시 반, 늦어도 6시까지는 일어나야 했다. 황금 같은 주말인데 마치 군대 훈련소에 다시 온 것 같았다. 시외버스 의자는 생각보다 불편했다. 잠을 자서 시간을 보내보자 싶어도 1~2시간 자는 게 최대였다. 나머지 3시간은 멍하니 창밖을 보면서 생각에 잠기거나 스마트폰을 봐야 했다. 책을 읽으려 해도 멀미가 났다.
걱정도 했다. 번역이라는 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잘할 수 있을까? 영어 독해는 좀 한다지만, 번역은 또 다른 영역 아닐까?
수업은 상당히 어려웠다. 영어를 읽는 것과 그걸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옮기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지금 와서 당시 숙제를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다. 정말 번역을 못 했다.
수업이 끝나고 수업 들은 회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을 먹고 나면 어느새 버스 탈 시간이 됐다. 7시 버스에 올라 자정 무렵 부산에 도착했다. 집에 와서 바로 자려고 해도 새벽 1시였다. 다음날 9시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월요일 아침, 사회복무요원 복무를 하면서 꾸벅꾸벅 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틈틈이 숙제를 했다. 다음 수업까지 2주 동안 연습할 분량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일요일이 되면 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탔다.
그렇게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번역의 기초를 배웠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한 일이었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배우고 싶으면 가야 하는 거고,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하는 거였다.
2016년 3월, 대학에 복학해 서울로 돌아온 뒤 단체에서 필요로 하는 간행물을 종종 번역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10년 후 내 삶을 바꿀 시작점이 될 줄은.
2025년 지금, 나는 전문 번역가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 출간된 책이 두 권. 이제 막 시작한 셈이지만, 그래도 그 첫걸음이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돌아보면 때때로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