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진짜 딸 같은 며느리

며느리 입장에서 딸처럼 굴어 볼게요

by 김용주

아직 강나비와 김소장이 결혼하기 전, 1970년대였다. 부산에 위치한 김소장의 집 전화벨이 울렸다.


"거, 여보시요."

"안녕하세요. 김소장씨 있어요?"

"없어요."

"저 나비 언니 동생인데요."

"아 그럼 잠깐 기다리라."


전화를 건 사람은 강나비의 동생이고, 받은 사람은 김소장의 어머니였다. 물론 두 사람의 별명이 생길 일이 일어나기도 전이니 당연히 본명을 불렀지만, 이 글에서는 강나비와 김소장으로 통일하고 있다.


안동 시골 지역에는 이장 집에나 전화기가 있던 시절이라 강나비의 동생들은 종종 전화심부름을 했다. 언니의 말을 전하려고 부산으로 전화를 걸 때마다, 누구의 동생인지 밝히지 않으면 김소장의 어머니, '조여사'는 무조건 아들이 없다고 대답했다. 강나비의 이름만이 프리패스였다고 한다. 강나비가 김소장과 7년 간 롱디연애를 이어간 데에는 시어머니가 될 사람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 말이다.


연락할 수단이 집 전화밖에 없던 시절, 전화를 바꿔주지 않는 어머니의 존재는 막강했다. 김소장에게도 "시골 여자 잘못 만나면 큰일 난다. 나랑 다시 만나자."던 전여자친구가 존재했으나, 철통 같은 조여사의 수비를 넘지 못하고 매달릴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나비는 믿었다.


"니 아빠가 안동에 처음 왔을 때 안동댐이야 도산서원이야 구경할 거 다 하고 마지막에 시장을 갔는데, 그때가 봄이라 시장에 산나물 말린 게 많았어. 뭐 다른 거는 줄 게 없고 내가 그 산나물을 한 보따리 사서 보냈거든. 너거 할머니가 요리를 그렇게 하는 사람인데 도시 사람이 그 시절에 산나물을 그렇게 잔뜩 받았으니 얼마나 좋았겠노. 그래서 내가 마음에 들었는갑지."


강나비는 얼굴도 보기 전부터 자신이 조여사의 마음에 쏙 들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세상에 어려운 상대가 없었다. 그래도 옛날 사람이니 시어른을 대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풍습이지만, 예전에는 신행 가서 시부모님에게 첫 식사를 차려 드리는 과정이 있었다. 여기서 '신행'은 신혼여행의 줄임말이 아니라 '결혼하고 처음으로 시가나 처가에 인사드리러 가는 것'을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나비가 신행 가서 처음 차린 밥은 상당히 맛이 없었다고 한다. 이 신행 이후로 강나비는 시가에서 한 번도 음식을 하지 못했다.


"내가 평소에는 잘하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간이 하나도 안 맞더라고."


아마 반만 진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간이 안 맞은 쪽이 진실이다. 사실 강나비는 음식을 썩 잘하지는 않는다. 한 가지 반찬을 한 달 내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강나비는 여전히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맛있게 잘한다"라고 주장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우리 애가 똑똑한데 공부를 안 해서 그렇다.'는 말이 떠오르는 사람이 혼자는 아닐 거라고 믿는다.


조여사가 둘째 며느리에게 받은 첫 밥상의 기억은 강렬했다. 이미 몇 개월 전 결혼해 함께 살던 첫째 며느리가 차린 밥상에 익숙해진 탓인지, 본인이 식당을 운영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인지, 조여사는 평생 다음과 같은 명제를 버리지 못했다.


"나비는 반찬 하나도 할 줄 모른다."


이것이 보령에서 모일 때 조여사가 80대의 몸으로 60대 며느리에게 먹일 반찬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야 했던 사연이다.


시어머니에게 일평생 '음식을 못 한다.'는 평을 듣고 사는 게 억울하고 기분 나쁘지 않았겠느냐고? 전혀 아니다. 강나비는 인천에 살면서도 평생 부산의 조여사가 담근 김장 김치를 먹고살았다. 다른 반찬도 종종 아이스박스에 담겨 고속버스를 타고 왔다. 조여사의 둘째 며느리는 노동력을 투자하지 않고도 요리 잘하는 시어머니가 담근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데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보통 음식을 안 하는 사람은 설거지라도 한다. 조여사도 요리 못하는 며느리에게 설거지라도 시켜볼 생각이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고, 설거지를 뭐 우예 했길래 부엌을 다 물바다로 만들어 놨노! 니는 부엌에 얼씬도 하지 마라!"


그 후로 다시는 설거지도 하지 않았다. 강나비가 시가 주방에서 하는 일이라곤 남들이 부쳐 놓은 전을 집어 먹거나 음식 간을 보면서 훈수를 두는 일 정도였다.


이렇게 들으면 혹시 설거지도 하기 싫어서 일부러 물바다를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강나비는 원래 물 조절을 잘 못한다. 지금까지도 세수 한 번에 윗 옷을 다 적시는 사람이다. 그럼 음식도 못하고 설거지도 안 하는 며느리가 그 옛날 경상도에서 명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강나비의 시집은 부산에 있고, 김소장은 인천시 소방 공무원이었다. 공무원은 휴일에도 비상 대기를 한다. 비가 많이 와도 비상, 눈이 많이 와도 비상이다. 소방 공무원은 큰 불이 나면 비상이 걸리는데, 당시에는 전국 어디에 있든 소집에 응해야 했다. 더군다나 명절에는 집을 비우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불이 크게 자주 났다. 먼 길을 떠났는데 비상이 걸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풀린 적도 있었다. 따라서 부산까지 가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강나비는 명절에 시가나 친정에 가지 않는 게 자연스러워졌고, 어쩌다 방문해도 체감상 5년이나 10년에 한 번쯤 가는 느낌이었다.


"아야! 내 손!"


10년까지는 아니겠지만 정말 몇 년 만에 부산에 가던 날의 기억이다. 강나비는 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문을 닫다가 손가락을 찧었다. 얼마나 다쳤는지는 모르겠지만 강나비는 손가락에 붕대를 칭칭 감고 부산에 갔다. 조여사를 만나자마자 "어머니~" 하면서 붕대 감은 손을 들어 올리던 모습이 생생하다. 결국 아주 오랜만에 시가에 가서도 아무 일도 안 하고 앉아 있었다.


큰 며느리와 셋째 며느리가 분주하게 음식을 차리는데 둘째 며느리는 김소장 옆에 앉아서 남편의 형제들과 함께 상에 차려진 음식을 먹고 있으니, 그 딸이 무엇을 보고 배웠겠는가. 당연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어른들 옆에 앉아 먹고 놀았다. 아마 내 또래 여자 중 명절에 경상도 할머니 집에 가서 엄마와 나란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버틴 사람은 정말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명절마다 돈은 잘 보냈다. 돈 잘 주는 며느리도 있어야지."


내 기억으로는, 명절에 일 안 하고 돈만 보내는 신세대 며느리는 내가 한참 크고 나서야 드라마 속에 당차고 할 말 다하는 캐릭터로 등장했다. 시대를 앞서갔다고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아무리 편하게 지낸다 한들 사이가 좋기만 할 수는 없다. 앞서 결혼할 때 한 푼도 받지 못한 사연을 소개한 바 있다. 그때 김소장이 받은 상처와 배신감으로 인해 조여사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서로 쌓아둔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미운 마음이 풀어질 계기가 생겼다.


"인천 와서 애들 밥 좀 해주이소."


강나비가 아플 때였다. 김소장은 버티다, 버티다 조여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머니를 원망하는 마음보다 자식들 밥이라도 챙겨 먹이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조여사는 인천에서 아들과 손주들과 몇 달을 함께 지냈고, 강나비가 완치 후 집으로 돌아올 즈음엔 어색하던 모자 사이도 좀 풀어졌다.


조여사도 인천 생활에 만족했다. 돌아온 강나비가 감사의 마음을 돈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삼십여 년 전 오백만 원은 큰돈이었다. 돈을 써야 할 때는 확실하게 썼다.


조여사와 강나비는 서로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었을 테지만 이야기가 잘 통했다. 조여사에게도 사정이 있었다. 첫째 며느리는 조여사를 모시고 살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혼했고, 셋째 며느리는 부산에 가까이 살았지만 아이들을 조여사에게 맡겨 놓고 일하러 나갔다. 큰 아들의 재혼으로 맞은 새 며느리와 한동안 사이가 좋기도 했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의지하고 마음을 나눌 사람은 멀리 사는 둘째 며느리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속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강나비에게 전화를 걸어 한참을 하소연하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 갸가 눈을 이렇게 똑바로 뜨고, 와 그라는데요? 이라는 기다!"

"근데 어머니, 그건 어머니가 잘못하셨네요."

"......글나?"


비록 강나비가 무조건 지지하거나 공감해 주는 사람은 아니어서 조여사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경우도 많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편했던 것 같다. 두 사람은 통화도 자주 했고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새벽 세 시, 네 시까지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하기 싫은 건 안 하고, 듣기 싫으면 듣기 싫다고 하고, 할 말은 하는 며느리이자 김장 김치를 비롯해서 먹고 싶은 건 다 해달라고 해서 얻어먹고, 명절에 집에 가서도 쉬기만 하는 며느리. 강나비는 시어머니 입장에서 말하는 딸 같은 며느리 말고, 며느리 입장에서 말하는 진짜 딸 같은 며느리였다.


조여사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내가 결혼하고 나서는 친정이 너무 머니까 엄마도 거의 못 보고 살았는데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기도 해서 우리 시어머니가 나한테는 엄마 같았거든요."


얼마 전 강나비는 다른 어른들과 함께 한 식사자리에서 조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디 의사가 했다는 말을 들으니까 돌아가시기 전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감각이 청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해주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우리 시어머니 계시는 병실에 가서 어머님, 그동안 감사했어요. 사랑해요.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요."


시어머니를 떠올리던 강나비의 목소리는 어느새 울음을 머금었다.


"근데 병실에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우리 시누이도 있고, 아주버님도 계시고, 복잡하고. 내가 평소에 하던 말이 아니라서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결국 말을 못 했어요."


그리고 그날은 강나비가 살아있는 시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여사의 부고를 받았다. 부산으로 내려간 강나비는 영정사진을 앞에 두고 서있었다. 그제야 입이 떨어졌다.


"어머니, 사랑해요."


'어머님이 저한테는 엄마였어요. 저를 딸처럼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히 쉬세요.'


사람들이 있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은 속으로 삼켰다. 시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나자 눈물이 쏟아졌다. 얼굴을 가린 상복 소매가 젖어들었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겨우 말할 수 있었다.


마음은 평소에 전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끝까지 하지 못하고 후회한다.


강나비는 더 이상 누군가의 딸이나 며느리로 불릴 수 없게 되었다. 강나비에게 남은 혈연이란, 엄마 또는 할머니의 자리뿐이다.


이제 딸과의 관계를 말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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