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그때 그 표어
"못하는 게 뭐야?"
학생 때부터 자주 듣던 말이다. 학교에서도, 일터에서도, SNS에서만 소통하는 사람에게서도 같은 질문을 받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다이어트요."
대충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한다. '열두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밥 못 빌어먹고 산다.'는 말처럼 그중 직업으로 연결될 만큼 특출 나게 잘하는 건 없지만 취미로 즐기기 괜찮은 수준이라고 주장해 본다. 그런 나를 두고 강나비는 늘 태교가 전부라고 말했다.
"내가 니를 뱄을 때 배가 이만큼 불렀는데도 어디서 그렇게 힘이 나는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여성회관 가서 오만 걸 다 배웠다니까. 책도 많이 읽고 그림도 배우고 뜨개질, 바느질, 노래, 글쓰기 다 배웠더니 니가 다 웬만큼 하잖아. 이렇게 잘하는 게 많은데 뭐가 될까 했더니만......, 아무튼 그래서 내가 사람들한테 태교가 전부라고, 제일 중요하다고 하거든."
그에 반해 동생이 뱃속에 있을 때는 김소장이 백수가 되는 바람에 임신 기간 동안 아무것도 못했다. 강나비의 아들은 잘하는 없는 건 둘째 치고, 일단 하고 싶은 게 없는 의욕 과소 인간으로 태어났다. 강나비의 '만물 태교설'은 더욱 강력한 힘을 얻었다.
그렇게 딸 하나, 아들 하나 4인 가족으로 단란하게 살고 있던 중 셋째를 임신했다. 첫째와는 아홉 살, 둘째와는 여섯 살 터울이었다.
딸은 강나비의 뱃속에 생긴 동생의 존재를 크게 반가워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덤덤하게 반응했다. 동생을 기다린다거나 보고 싶다거나 하는 느낌도 없이 그저 남일처럼 여겼다. 강나비의 부푼 배를 만져보면서 '다른 집은 다들 애가 둘인데 왜 동생이 또 생기지? 애들은 둘만 낳는 거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 동네에는 아들 하나인 J오빠네 집과 딸 셋인 H언니네 집 말고는 전부 아이가 둘이었다.
아홉 살이라는 나이를 고려하면 그런 생각을 할 만했다. 그때는 4인가족이 보편적이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그보다 훨씬 아이를 많이 낳았다. 강나비는 6남매, 김소장은 4남매, 강나비의 안사돈은 9남매, 바깥사돈은 6남매였고,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육남매>라는 제목의 드라마도 있으니 그 시절에는 얼추 6남매 정도가 평균이 아니었을까? 요즘은 외동도 많고 셋 이상의 다자녀 가구도 많지만, 우리는 한때 자연스럽게 4인 가족을 한국 가정의 기본 단위쯤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그리고 문득 이 4인가족을 '자연스럽게 느꼈다'는 점에서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지금도 익숙한 표어들이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저출산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 시점에서 돌아보면 정말 최악의 표어도 등장한다.
'둘도 많다!'
정부는 96년에서야 산아제한정책을 포기했다. 90년대까지도 예비군 훈련장에 가면 무료 정관시술 버스를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산아제한 정책에 관한 기사를 검색해 보면, 80년대에 의무적으로 정관수술을 해야 했던 공무원의 증언이나 자녀가 둘 이상이면 승진에서 밀린다는 웃지 못할 풍문이 돌았다는 내용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공무원인 김소장의 정관수술 여부에까지 관심을 두고 싶지는 않았으나, 셋째를 가졌다는 시점에서 강제로 알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이를 더 낳고 싶어도 낳지 말라는 강력한 사회적 압박 속에서 강나비는 셋째를 임신했다. 그 시절 셋째부터는 의료보험 혜택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지금은 애국자로 칭송받는 다자녀 가정에게 정말 가혹한 시절이었다.
배는 점점 불러오는데 이층 집을 새로 짓고 있던 중이라 매일 공사 진행을 확인해야 했다. 강나비는 새 집에서 셋째를 맞이하기 위해 미리 준비를 시작했다. 이미 출산 경험이 있는데도 둘째를 낳을 때 간호사를 붙잡고 무섭다고 떨었던 강나비였다. 세 번째 출산을 기다리는 심정은 어땠을까.
출산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다.
아이 엄마들을 만난 자리에서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면 한 명은 꼭 출산할 때 고생한 얘기를 시작한다. 누군가 신호탄을 쏘면 기다렸다는 듯 돌아가면서 자기 사연을 꺼낸다. 남자들 군대 얘기와 같은 재질이다.
"저는 애 낳다가 죽을 뻔했어요. 애는 머리가 걸려서 안 나오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기절했잖아요."
"우리 애가 탯줄이 목에 감겨서 얼굴이 새파래진 거예요. 애가 숨을 못 쉰다고 난리가 났었어요. 남편은 제발 살려달라고 옆에서 울고......."
"진통하다 제왕절개하는 건 진짜 최악이에요. 유도분만 16시간 하다가 제왕절개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관절 열릴 거 다 열리고 진통 다 했는데 수술하면 얼마나 억울한지."
"저는 애 낳을 때는 고생 안 했어요. 유산된다고 20주부터 병원에 입원해서 누워만 있었거든요."
각자 자기 사연 얘기하다 눈물을 훔쳤으면서, 다음에 만나서 술 먹으면 그 얘기를 처음부터 다시 한다.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들었던 얘기를 또 들어도 끝나지 않는 게 출산할 때 고생한 이야기다. 출산 중 사고가 일어나는 일은 여전히 흔하고, 사망 사고도 심심치 않게 접한다.
다른 이야기는 자라면서 반복해서 들었지만 셋째를 출산할 때 이야기는 스치듯 한 번 정도 들은 게 다고, 다시 물어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 도착한 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른다. 노산이라 제왕절개를 계획했던 건지, 응급 수술이었는지, 수술을 위해 마취를 했었는지, 아니면 분만 중 출혈로 인해 기절했던 건지도 정확하지 않다. 확실한 건 정신을 잃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입원실에 누워 있던 강나비는 눈을 떴다.
"......."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음소거된 듯 병실은 고요했고 등골을 서늘하게 스치고 지나간 냉기가 손끝까지 뻗어가는 게 느껴졌다. 기온이, 낮은가? 추운가? 이가 덜덜 떨렸다. 입술을 몇 번 달싹여 쥐어짜듯 겨우 성대를 열었다.
"...... 아기는요?"
아기를 보기 위해 옆으로 돌린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의사와 간호사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이미 뱃속에서 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아기는 죽어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나는 한참 동안 아이를 잃은 강나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냥 뿌옇게 흐려진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지, 하고 기억 저장소 한 편에 밀어두었던 것 같다. 바닥 깊은 곳에 가라앉았던 기억은 내가 첫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 다시 떠올랐다. 임신 사실을 비밀로 하던 중이라 일터에서 무거운 상자를 날라야 했을 때, 아릿한 아랫배의 느낌에 유산이 걱정되어 병원을 찾던 날이었다. 아직 몇 주 밖에 안된 아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이렇게나 두려운데, 9개월이 넘도록 품고 있던 아기를 만나는 날이 아기와 영영 이별하는 날이었다니.
그제야 그 옛날 강나비의 슬픔을 도저히 짐작할 수 조차 없다는 걸 깨닫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만약 무사히 태어나 살아 있었다면 우리 집에는 나보다 아홉 살 어린 동생이 한 명 더 함께 했을 것이다. 5인가족이 되어 여행을 가서 한 방을 쓰기도 어렵고, 식당에서는 항상 의자를 하나 더 가져와야 했을 테고, 자동차 뒷좌석에는 세 명의 몸이 꽉 끼어 있었겠지. 그 애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강나비는 가끔 셋째를 가졌을 때의 태몽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기를 잃을 때의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어도, 아기가 찾아왔을 때의 기쁨과 기대는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셋째는 태어나지 못해서 이름이 없다.
태몽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 번쯤 태명을 물어볼 걸 그랬다. 태명일지라도 셋째를 부를 이름이 있었을 텐데. 이 세상에 한 순간도 존재하지 못했던 이름 없는 내 막내 동생의 흔적을 이렇게라도 남겨 둔다.
이미 두 아이가 있었던 강나비는 어떻게든 슬픔을 갈무리하고 이겨내기 위해 셋째를 가슴에 묻었다. 새로 지은 이층 집에서는 언제 5인가족이 될 준비를 했냐는 듯 다시 단란한 4인 가족의 생활을 이어갔다.
넘어져도 일어서고 꺾어져도 피어나던 강나비는 이번에도 다시 날아올랐지만, 강나비와 가족들에게 닥친 가장 큰 시련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웅크린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