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비가 없어도 세상은 잘만 굴러간다
사춘기는 언제쯤 올까? 요즘은 사춘기가 오는 시기도 좀 빨라졌다지만 2차 성징을 기준으로 가늠해 보자면, 나는 5학년이나 6학년쯤 사춘기가 왔어야 했다. 나와 동생에게는 사춘기가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 때 오지 않았다.
강나비는 내가 6학년, 동생이 4학년이던 때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져 손을 쓸 수 없게 되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가족사이고 지금까지도 서로 잘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병명을 자세히 밝히지 못하는 점을 양해 바란다. 어린 나이라 병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눈치는 있었기 때문에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중학생이 되기 전부터 이미 강나비가 가정으로 돌아올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체념하기까지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가망 없는 일에 매달린 사람은 김소장 하나였다.
강나비는 김소장을 두고 "그렇게 시야가 좁은 사람은 결혼 전에는 자기 엄마밖에 모르고, 결혼하면 마누라밖에 모르고, 자식 낳으면 자식밖에 모른다."라고 평한 적이 있다. 김소장은 다정한 사람은 아니다. 그를 표현하는 한 단어를 골라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헌신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소장은 포기하지 않고 강나비를 다시 건강하게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정말로 뭐든지 다했다. 지금 생각하면 누가 들어도, 김소장 스스로도 너무나 어리석다고 비웃겠지만 극한에 몰린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게 되는 법이다.
"내 딸아, 네가 어릴 때 교회에 다닌 적이 있어 나의 음성을 듣는구나."
강나비를 고쳐 주겠다며 누군가 소개한, 사이비인 게 뻔한 목사와 통화할 때 들은 말이다. 참고로 김소장은 종교가 없다.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는 자라면서 김소장과 통화한 뒤, 딸도 바꾸라고 해서 "내가 너의 엄마를 고쳐줄 테니 걱정 말아라."라고 말하던 상황이었다.
'개소리하고 있네. 사기꾼 새x가.'
열세 살의 나는 당연히 나는 믿지 않았으나 여기에라도 매달려 보려는 김소장의 의지를 꺾지는 않았다. 물론 지푸라기 한 가닥마다 몇백만 원씩을 뜯긴 줄 알았으면 정신 나갔냐고 소리를 질렀을 테지만.
누가 순진한 공무원을 벗겨 먹으려고 작업을 쳤는지 무교인 김소장은 강나비를 고쳐준다고만 하면 교회, 성당, 무속신앙의 힘까지 닥치는 대로 빌렸다. 한동안 먼 지방의 산속 오지에 있는 기도원에도 강나비를 데리고 갔다. 당연히 모아둔 돈은 밑 빠진 독에서 빠져나가는 물처럼 사라졌다. 김소장은 혼자 중학생이 된 딸과, 초등학생 아들을 키우면서 쉬는 날에는 강나비를 치료하려고 안 다닌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김소장은 자식 교육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증거가 남아 있다. 내가 중학생 때 인천에서는 사춘기 아이들을 위해 매주 부모와 편지를 주고받는 공책을 만들었는데, 김소장은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매주 편지를 정성 들여 써줬다. 내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억지로 칸을 채우면, 김소장은 항상 '잘해줘서 고맙다.', '학교 잘 다니고 공부 잘해서 장하다.', '기특한 우리 딸, 아빠가 항상 믿는다.' 라며 오히려 나의 기운을 북돋았다.
강나비가 아프던 시절의 나는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지만 사실은 감정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에게는 희망이 없었고, 엄마라는 존재의 부재에 익숙해져 있었고, 곧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체념하고 있었다. 예정된 슬픔에 절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힘들거나 슬프거나 불행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때의 나는 내가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러나 강나비가 처음 아팠던 6학년 때 방학 숙제로 썼던 일기장을 보면, 일기는 한 편도 없고 얼토당토않은 시만 잔뜩 쓰여있다. 내 일상이 무너져 있어서 일기를 쓸 수 없었고, 자존심이 너무 세서 내가 힘들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도, 표현하고 싶지도 않아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감정의 문을 닫았던 것으로 이제 와 변명해 본다. 당시의 담임선생님은 무섭기로 소문난 학년 부장선생님이어서 잔뜩 혼날 걸 각오했었는데,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 코멘트 없이 도장만 찍어주었던 것 같다.
강나비가 아픈 기간은 2년이 넘어갔다. 김소장도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 다 잡아 뽑고 난 뒤에는 순순히 병원에 모든 것을 맡겼다. 기적은 마지막으로 입원한 병원에서 일어났다. 그 병원에서, 나도 아직 이름을 기억하는 의사 선생님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강나비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되찾았다.
그분은 매일 강나비에게 직접 약을 먹이고, 몸을 움직이도록 돕고, 힘을 내라고 말했다.
"강나비씨, 자식이 둘이 있잖아요. 딸 하나, 아들 하나 있다면서요. 그 아이들 보러 집으로 돌아가야죠."
짧게 축약해서 썼지만 병원 시절을 한 편의 글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지극한 정성이었다고 한다. 회복하고 잘 살게 된 강나비의 집에 전화를 걸어 "강나비씨, 저 김XX예요. 잘 지내고 있나요?"라고 물은 뒤, 의사를 그만두었다고 소식을 전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의 일이다. 강나비가 그의 마지막 환자였으니 건강하게 잘 살라는 말도 함께였다. 감사한 마음에 그분을 찾으려고 수소문해 보았지만 어디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그분의 행복을 빌고 있다.
다시 강나비가 병원에 있던 시절로 잠시 돌아가보자. 자식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에 딱 한 번 면회를 간 적이 있다. 인천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병원에 가서 약 때문이 퉁퉁 부은 강나비를 마주하고 어색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면회를 하고 난 뒤 얼마 후 강나비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강나비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약을 먹어야 했고, 붓고 둔해진 몸 때문에 팔이 잘 들리지 않아서 목욕탕에 가면 중학생이던 내가 강나비의 몸을 구석구석 씻겨 주었다. 그러니 내겐 사춘기가 왔다가도 "아이쿠, 내가 올 자리가 없군."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그래서 질풍노도의 시기 없이 잘 지나갔느냐 하면 중2병에 중2에 오는 것도 축복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춘기가 와야 할 때 안 오고 고등학생 때쯤 다시 찾아와서 김소장이 곤욕을 치르게 된다. 동생은 내 생각에 지금인 것 같다.
2014년에 YTN에서 보도한 뉴스에 따르면 남자 암환자는 96.7퍼센트의 배우자가 간병을 하는 반면, 여자 암환자는 배우자가 간병을 하는 경우가 27.5퍼센트에 그쳤다. 강나비는 암에 걸린 것은 아니었지만, 재산은 재산대로 거덜내면서 다시 건강해지리라는 희망이 거의 없는 상태였는데도 김소장은 아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켜냈다. '아픈 아내를 간병하는 남자'의 비율로 말해 보자면 김소장은 반올림해서 28퍼센트의 남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혼자 일하고, 자식들 키우고, 아내를 간병하느라 정작 자기 몸은 돌보지 못했던 김소장은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이를 다 못 쓰게 되었다.
"일어날 일은 다 일어나게 되어 있거든. 내가 그렇게 아플 줄 알고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신랑감을 미리 점찍어서 소개해줬나 보다."
앞서 두 사람이 만난 이야기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강나비는 지금까지도 꿈에서 증조부가 소개한 남자가 김소장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증손녀가 아무리 큰 시련을 겪어도 옆에서 참고 인내하며 가시밭길을 함께 걸어가 줄 인내심 강하고 착한 증손녀사위를 찾아 그날 그 용두산 공원에 데려와 준 것이 아닌가 하고.
2년 반 만에 집에 돌아온 강나비는 변했다. 그렇게 돈을 아끼고 모으면서 자기가 없으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가정이 막상 자기가 없어도 어떻게든 돌아간 걸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 충격을 받았다. 실상 그렇게 잘 돌아가진 않았지만 지나가버린 시간은 알 수 없으니 결과만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겠지. 그 후로는 주말에는 항상 외식을 하며 사고 싶은 것도 사고, 즐거운 자리도 많이 찾아다니게 되었다.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제2의 인생을 얻은 해피엔딩 같지만 문제는 남아 있었다. 아프기 전 강나비가 투자했던 주식이 IMF의 여파로 휴지조각이 되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