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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an Mar 30. 2021

RE-WRITE : 지 대 넓 얕 제로 #4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제로


Chapter. 4

도가


"베다"가 고대 인도인들의 사상의 집합체였다면 "도가"는 이제 지역을 옮겨 중국에서 시작되게 된다. 


이번 챕터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게 되는 인물은 두명인데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분들이다.

"노자"와 "공자"가 바로 그들이다. 


노자의 도덕경 

그리고 공자의 논어 


안 들어 본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리라. 하지만  접근하기 어려워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들도 많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마치 수학의 정석처럼 몇페이지 들춰본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 책 덕분에 약간의 용기가 생긴 참이다.

노자가 어떤 분이었는지, 또 공자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들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이해가 되고 나니 진정으로 그들이 생각한 인간의 삶에 대한 기준과 방향 그리고 진리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먼저는 노자다. 

노자의 탄생과 죽음의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나와 있지는 않다. 

다만 그는 오랫동안 관직에 머물렀고 삶의 본질에 대한 사상적 정립 이후에 누구는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하고 누구는 그가 진리를 찾아 길을 떠났다고도 한다. 그가 떠나기 전 만났던 자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건넸고 그것이 지금의 '도덕경'으로 전해진다. 


그래, 노자 하면 도덕경이라는데. 

그럼 도는 무엇이고 덕은 무엇인가?



도 : The way : 길 : 우주의 질서

덕 : Inner power : 내면의 힘 : 내면의 질서와 본질



노자가 깨달은 도와 덕은 위와 같다.

이전에 만나본 베다의 경전에 내용과 비교해보면 어떤가? 


도는 마치 베다와 같다. 온 우주를 관찰하고 탐구하며 궁극적으로는 우주의 질서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덕은 마치 우파니샤드 같다. 내면의 수양과 내면의 질서를 추구해 본질적인 힘을 바라본다. 


단어 자체만 봐도 우리는 도를 뭐라 표현하기 참 어렵다. 그나마 덕이라는 단어는 어떤 뉘앙스이며 느낌인지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 

누가 감히 우주를 정의할 수 있겠는가? 물론 사전적인 정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주를 깊게 들여다 보면 볼수록 더 알 수 없는 것이 우주의 섭리가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도라는 것은 그것 그대로의 자연스러움 자체가 될 것이며 여기에 무위의 자연스러움이 합쳐지게 된다면 그것이 온전한 덕이 될 수 있다. 


조금 어렵지만 이렇게 이해해보면 좋겠다. 

노자의 도덕경, 그의 사상은 탈세속적이다. 맞다. 우파니샤드와 같은 맥락이다. 

내면적인 수양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관직을 떠나 노년에 어디론가 떠났다. 그가 남긴 도덕경을 끝으로 말이다. 


노자는 일단 여기까지.

이제 공자를 보자.


공자는 노자와 다르게 탄생과 죽음이 명확히 기록된다. 

그는 기원전 551년 노나라에서 탄생하고 기원전 479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는 노자와는 정 반대였다.

춘추전국시대에 과감하게 활동한 위대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다. 긴 시간 자신의 정치적 사상에 부합하는 주군을 찾아 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제대로 안착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말년에 더욱 후학 양성에 힘썼고 이 제자들이 훗날 위대한 사상가의 명맥을 잇게 된다. 



공자의 논어, 핵심은 인 (仁)



앞서 말했듯 공자는 열정 넘치는 정치가였다.

그래서 공자의 여러 사상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 인, 의, 예 역시 마찬가지다. 

이 공자의 사상이 그가 죽고 나서 제자들에 의해 정리되고 이어져 맹자에게 전달되 유가의 발전을 이루고 순자와 한비자에게 전달되 법가를 이룬다. 


인,의,예가 담긴 유가 즉, 유교 사상은 중국 전역에 전파되고 중화권의 영향을 받는 지역들에 퍼져 스며든다. 우리나라도 동일하게 많은 영향을 받고 유교 사상의 근간아래 국정이 운영되게 된다.

 

그래서 공자의 사상은 세속적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비롯된 사상적 자세가 필요하며 이는 결국 사회와 맞닿아 있어야 했다. 혼자서 도도히 이 모든 것들을 지켜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평가해 줄 누군가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여기서 도가와 유가 사상이 탈속과 세속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 두 사상이 부딪친 적이 있었으니 노자와 공자와의 만남이다. 패기 넘치는 나이였던 30대 공자가 노년의 노자를 만나게 된다. 80세 정도로 추측되는데 위대한 사상가였던 노자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아마도?) 공자가 묻는다. 


"예란 무엇입니까?"


그렇다. 공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정의하고 있는 예의 기준과 비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자 입장에서 이런 질문은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왜일까?


노자에게 이 세상의 가치는 이미 필요가 없어졌다. 

내면의 본질을 추구하고 갈고 닦으면 그 안에 우주가 있거늘 세상의 가치 기준이 무슨 소용이랴. 어쩌면 통달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젠틀하게 이야기 했겠지만 저자의 말대로 풀어 써 보자면 "너 세상 구한답시고 여기저기 얼굴 알리며 돌아다니고 있는데, 진짜 능력자들은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다. 그리고 너 교만하고 욕심 많아 보이니까 앞으로 조심해라."


어떤가? 뉘앙스 자체만으로도 '까불지 마라'라는 느낌이 가득 들지 않는가? 당대 위대한 사상가에게 이런 쿠사리(?)를 먹은 공자가 여기에 대고 분노하지 않으며 제자들에게 노자를 세상의 모든 것을 통달한 용을 만난 느낌이었다고 한다. 역시 그릇이 다르긴 한 모양. 


우리가 여기서 바라봐야 할 것은 이 대화를 통해서 노자는 노자의 사상대로, 공자는 공자의 사상대로 행동하고 나아갔다는 것이다. 노자는 공자의 세속적인 행동들에서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고 공자는 노자의 말을 듣고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에게 배운 점들을 다시 가르치며 자신의 인,의,예의 자세를 실천했다. 


그러나 나는 감히 조금 더 노자의 사상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 


'니까짓게?' 라고 손가락질 해도 좋다. 맞다. 감히 내까짓게 어디 공자가 높니, 노자가 높니 깊이를 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노자의 예리한 통찰이 참 마음에 든다. 



덕이 없는 사회에서는 인이 강조되고, 인이 없는 사회에서는 의가 강조되며

의마저도 없는 사회에서는 예만 강조된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왜 공부를 하라고 할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이 필요해서 이고 잘 유지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 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 왜 주변에서 정신부터 차리라고 할까?

그 사람이 정말 위험해 보이거나 잘못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것들 요구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결핍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에서 인, 의, 예를 중요시 한다면 그 사회는 반대로 인, 의, 예가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가 분명히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인, 의, 예는 그것을 관찰해주는 관찰자 혹은 감시자가 필요하며 저 사람이 인, 의, 예가 갖춰졌다 라고 인정받아야 하는 외향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더불어 그것을 억지로 지키려고 하는 '자연스럽지 못한 내면의 상태'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인위적이고 인조적이다.

인간이 어떻게 인, 의, 예를 지켜가며 살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을 지켜 나가며 산다고 한들 그 삶이 정말 자연스러운 삶일 수 있는가. 단순하고 어려운 인, 의, 예의 삶보다 그 이상의 가치라고 말한 노자의 덕을 바라보며 내면의 수양을 쌓아 가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스스로를 완성해 갈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누군가가 판단하는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좋은 모습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기 때문이다.


나는 화도 내고 욕도 하고 가끔 지랄 맞기도 하다. 

뭐, 어쩔 그게 나인데. 

좋은 모습이 아니라고 내가 판단하면 내가 고치면 그만인 것을.

중요한 것은 내면의 수양을 통해서 내 잘못을 내가 깨닫고 고쳐가는 걸음이 필요한 것이지

타인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어거지로 씌운 프레임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노자와 공자 

위대한 두 인물의 사상적 차이와 귀한 깨달음을 얻는다.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 것 같다. 

당신은 어떤가? 도가와 유가 어디가 더 당신의 마음에 와 닿는가?

한번쯤은 그들의 사상 앞에 공감하고 그들의 안경으로 자신의 삶을 투영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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