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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an Mar 03. 2017

보고 나면 녹초가 되버려

영화 <해빙>

" 심각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으시다면 돌아가 주세요!"


오랜만에 작품 다운 작품을 보고 온 것 같다. 무엇보다 믿고 볼 수 있는 국민 배우 조진웅 씨가 포스터에 떡하니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포스터만 봐도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들이닥쳤는지 궁금하다. 예고편을 보지도 않았다. 역시 영화는 백지상태에서 만나야만 그 참맛을 느낄 수 있나 보다. 포스터를 보고서 그의 수척해진 얼굴과 표정에서 이 영화는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가에 대해 궁금증만 가지고 있었다.

 역시나 영화는 대단했다. 재미 그 이상으로 심각하게 그 안에 빨려 들어갔다가 돌아 나왔다. 어마어마한 몰입도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누군가 나를 얼려놓았던 것 같다. 제목처럼 영화가 나를 녹여주기 전까지 나는 온전히 영화 속에서 얼어있었다.



  나는 조진웅이 '형사'로 나올 줄 알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포스터만 보고 갔기 때문에 그가 오히려 취조를 당하는 위치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강남의 잘 나가는 의사에서 화성의 작은 개인 병원의 내과의사로 오게 된 '승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장에는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좋지 않은 이유로 강남을 떠난 것은 분명하다.

 '승훈'이 세 들어 살고 있는 건물의 주인인 정육점 사장, 사장의 늙은 아버지는 영화 초반 내시경 시술 후 마취에서 종종 환자들이 하게 되는 잠꼬대에서 자신의 살인 고백을 하면서 '승훈'에게 의심의 씨앗을 심어주게 된다. 그것이 자라고 자라면서 '승훈'은 그 부자가 화성의 풀리지 않은 미제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고 믿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피해자의 머리가 냉동창고에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승훈' 주변에 그가 믿는 만큼의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아내와의 트러블, 병원 내부의 간호사가 저지른 프로포폴 유통,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듯한 정육점 사장. 그 모든 사실들 앞에서 그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임에도 말이다.

 영화는 제목처럼 모든 사실들을 도저히 깨뜨릴 수 없는 얼음 속에 가둬두었다. '승훈'의 정신은 그렇게 동결되었다. 오로지 선한 모습만을 간직했다. 그가 강남의 병원에서 화성으로 도피한 이유조차도 그의 머릿속에 꽁꽁 숨겨 얼려두었다. 누군가 그것을 깨주기 전까지는 그에게 있어서 진실은 없었다. 그저 의심과 회피뿐이었다.

 '승훈'은 프로포폴 중독자였다. 사채를 썼고 사채 업자의 사장을 살인하기에 이른다.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화성까지 도피를 했으나 약물의 환각 때문인지 그는 그가 했던 범행 사실을 잊고 마치 다른 자아를 가진 양 살아가게 된다.

 영화의 포스터, 그 장면. 그곳에서 녹아내린 진실 속에서 '승훈'은 그리고 그 장면을 보는 우리는 전율한다. 왜냐하면 그 사실이 밝혀지기 이전까지 '승훈'의 모습은 영락없은 피해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물론 몇 가지 눈에 띄는 복선들이 있었다. 그가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짐작과 과연 그는 깨끗한가에 대한 의문을 충분히 품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 관객들은 '승훈'의 행동을 감시해야 했고 동시에 정육점 부자의 행동들도 유심히 봐야 했다. 그러기엔 어마어마한 집중력이 필요했고 끊임없이 당겨지는 긴장감이 동반됐다.



 그 모든 집중력과 긴장이 마지막 장면이 돼서야 조금 해소되긴 하지만 그만큼 진이 빠지기도 했다. 마치 과거 유명세를 떨쳤던 '곡성'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곡성'만큼의 난해함과 해석의 필요성이 느껴지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재밌고 즐길 수 있는 영화였다. 적당한 자극을 끈질기게 이어나갔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영화 자체에 매료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미친놈'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조진웅 씨의 연기력에 대해서 감히 누가 따지겠는가 싶다. 아무리 좋은 대본과 스토리, 장비와 연출력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하나의 인물을 표현해 내야 하는 것은 온전히 배우의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이미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조진웅 씨뿐만 아니라 노련한 노년 배우 신구 선생님과 최근 귀염 터지는 캐릭터에서 다시 살벌한 살인마의 이미지를 가지고 스크린에 등장한 김대명 씨 그 외에 다른 배우들의 빨려들 듯한 연기력 덕분에 보는 우리들의 긴장감도 그만큼 배가 됐었던 것 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슴속에 묻어둔 혹은 꽁꽁 숨겨둔 진실이 하나쯤 있지 않을까? 당신은 언제 그 진실과 마주할 것인가? 언제 그 진실을 녹여 세상에 내놓을 것인가? 세상이 아무리 환각 속의 광기 일지라도 언젠가 녹아 드러날 진실이라면 조금 더 빨리 마주할 용기를 내야 하지 않을까.

 feat. 김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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