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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an Jul 24. 2017

나는 그곳에 있었다. 생존이 목적이었던 덩 케르크에

영화 <덩케르크>

 나는 개인적으로 전쟁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물론 모든 전쟁영화를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를 보기 시작한 나이부터 지금까지 웬만한 전쟁영화는 챙겨보았고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도 '밴드 오브 브라더스' 일 만큼 전쟁영화 광이다. 단편적으로 봤을 때 어쩌면 나는 전쟁영화만의 매력적인 폭발음과 전쟁영화만이 담고 있는 짜릿한 전투, 그리고 그 속에 사람과 사람 간의 갈등과 전우애 등을 좋아하는 경향일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단순무식하게 전쟁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번 영화 <덩케르크>는 절대 내가 좋아할 만한 전쟁영화는 아니었다. 짜릿한 전투도, 폭발하는 소음도, 들끓는 전우애도 없었다. 조용하고 잔잔했으며 전쟁보다는 사람에 초점을 맞췄다. 어쩌면 전혀 나와 맞지 않을 것 같았던 이 영화를 나는 꽤 오래 기다렸고 또 역시나 감동했다. 나는 1시간 반 동안 충실하게 덩케르크 해안에서 생존을 위해 보이지 않는 적과 혈투를 벌였고 나를 구해줄 사람들을 마주했으며 벅차오르는 감격을 느꼈다. 영화는 놀랍게도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덩케르크>는 내 기준에서 절대로 전쟁영화는 아니었다. 적과 싸우는 전쟁보다 생존을 위한 혈투의 현장이었고 놀란 감독의 아름다운 선율이 만들어낸 한편의 교향곡이었다. 너무도 조용하고 또 잠잠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그 현장을 치열하게 만들어냈다. 

 <덩케르크>의 전쟁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유럽 대륙의 끝자락에서 한계까지 밀린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도저히 도망갈 곳 없는 덩케르크 해안에서 33만 명이 넘는 병력이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작전. 그것은 비단 군뿐만이 아니라 영국의 국민들이 함께 뛰어들었던 작전이었고 그들이 있었기에 저 어마어마한 병력이 살아서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 일대기를 영화는 세부분으로 나뉘어서 전달하고 있으며 그 세부분이 하나의 시간에서 각기 다르게 마주함으로써 영화의 맛을 더욱 높이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은 1차 세계대전보다 더욱 치열하고 더욱 격렬했다.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도 없이 많은 사망자들을 냈다. 인간은 전쟁의 기계가 아니다. 감정을 가진 인간은 이 전쟁 통 속에서 자의든, 타의든 뛰어들어야 했지만 그 속에 생존이라는 본능을 깊이 쥐고 있었다. 덩케르트의 30만 명이 넘는 군인이 아닌 '생존자'들은 이 생존의 본능에 휩싸여 있었다. 그 모습을 영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전의를 상실한 군인들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살기를 바랐다. 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생존에 매달렸다. 가교에 달려들고, 부상자를 들쳐 엎고 비열하게 배에 오르기를 바랬으며 혹은 바다에 스스로 뛰어들기도 했다. 생존을 위한 발버둥 중에 이 장면이 가장 깊이 와 닿았다. 마치 불이 난 고층 빌딩에 갇힌 사람이 그 높이를 착각하고 뛰어내리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일으켜 뛰어내리는 것처럼 전투장비를 해제하고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병사를 어떤 이는 자살이라고 느꼈을지언정 그는 반드시 바다로 가면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뛰어들었으리라 나는 생각했다. 

 그런 그들을 살리기 위해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든 영국의 국민들. 작은 배가 아니면 해안에 도달할 수 없었기에 자발적으로 혹은 징발되어 달려든 그들의 작은 배들은 생존을 갈망하는 인간들에게 한줄기 희망이었으며 그들이 내지른 환호를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조국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고 영국의 국민들이 있었기에 그들은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원하던 생존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렇게만 흘러갔어도 좋았을 스토리에 영화는 전투기 조종사의 이야기까지 들려준다. 영국 본토를 지키기 위해 많은 병력을 덩케르크로 보낼 수 없었던 영국은 세대의 스핏파이어를 출격시키고 이들은 천신만고 끝에 단 한 대만이 덩케르크에 닿는다. 물론 그 길에 생존자들을 공격하는 적기들을 격추시켰으며 도착한 한 대는 기름이 다했고 프로펠러가 돌아가지 않는 채로 덩케르크 상공을 활강한다.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전투기 조종사는 자신의 소임을 다 한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덩케르크의 생존자들을 위해서 오히려 본인의 생존 욕구를 내려놓는다. 아이러니하다. 
 


 결국 영화는 이 세 가지 시점이 아니었을까? 
- 끝까지 생존만이 목적이었던 그들 
- 해안의 생존자들을 어떻게든 구해내려던 그들
- 생존자들을 위해 자신의 생존 욕구를 내려놓은 그들 

 이 세 가지 시점이 모여 영화를 만들었고 <덩케르크>의 역사를 써 냈다. 참 멋지고도 감동적인 전쟁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만큼 멋지게 그려낸 영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단순히 그 부분의 종결은 아니었기에 나는 이 영화를 근래에 전쟁영화 중에 최고로 뽑고 싶다.

 고진감래 끝에 복귀해서 찬란한 햇살을 맞으며 본토로 돌아온 병사 앞에 신문지가 놓이고 그것을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내 귀에 올곧이 내려 꽂힌 단어는 신문 속 'Fight'였다. 절대 항복 의지가 없는 영국 정부의 어떻게든 싸워내겠다는 의지 아래 병사의 표정이 떠오른다. 마치 끝날 것 같았던 그 영화의 마지막 순간을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의 병사 얼굴로 마무리 지어냈다. 나는 그 순간 병사의 표정에서 단 하나의 단어를 떠올렸다. '뫼비우스' 그 시대의 청년들에게 생존은 결국 내가 죽어야만 끝나는 뫼비우스의 지옥 같지는 않았을까? 오늘 전투에서 내가 살았더라도 빌어먹을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면 다시 내일 생존게임을 시작해야 하는 끔찍한 무간지옥은 아니었을까? 

 병사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다시 전투에 이끌려나가야 하고 오늘 쟁취한 생존을 내일 또다시 쟁취해야 한다는 고통을, 그 현실을 마주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에게는 덩케르크가 끝났을 뿐이다. 내일은 또 다른 덩케르크를 겪어야 할지 모른다. 결국 생존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였다. 물론 아름답게 풀어낸 놀란 감독의 놀랄만한 연출력에는 정말 극찬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지독하게 빠져든 몰입감 속에서는 나는 정말 그 현장에 있었고 그들의  생존에 동참하고 환호했다. <덩케르크>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전쟁영화로 남을 것 같다. 이만큼 잔잔하게 전쟁의 끔찍함을 보여줄 수 있을까 싶다. 당신도 <덩케르크>에서 그들의 순간을 함께 보냈으면 좋겠다. 

 feat. 김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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