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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an Oct 28. 2017

산다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거야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제목만 봐서는 좀비 영화 같았다. 
 포스터를 보고서 의아했고,
 영화를 보고서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이 아이러니한 제목에 감동했다.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 자체의 의미겠지만 그것이 처음으로 보이는 제목 또한 중요하다. 마치 가판대에 진열된 맛있는 음식의 모형들을 보고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많은 것처럼 작품의 제목도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보다 자극적이고, 맛깔나 보이는 제목들이 판을 치는 작품 세계에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제목은 누가 봐도 눈에 확 띄는 타이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내용면에서 더 큰 반전은 준다. 잔잔하고 감동적일 것 같은, 췌장이라는 어울리지 않은 소재와는 다르게 아름다울 것만 같은 포스터에서부터 그 반전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된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만들어냈던 전형적인 연애 드라마 장르이지만 언제나 봐도 색다른 것이 또 일본 영화의 장점이 아닐까. 그들이 보여준 한편의 드라마가 오늘도 내 가슴을 크게 치고 있다.


당신은 이 영화 어떻게 보았는가?



 영화는 시작부터 이 췌장을 먹는다의 의미를 해석해준다. 아마도 모두가 궁금해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부터 내놓고 싶었던 것 같다. 췌장을 먹는다는 것은 여주인공은 '사쿠라'의 병과 의미가 맞닿아 있었다. '사쿠라'는 췌장에 병을 가지고 있다. 에너지를 만들어 내야 하는 췌장이 그 역할을 다 하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고 자연스레 '사쿠라'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췌장을 먹는다'라는 것은 췌장에 병이 있던 '사쿠라'가 다른 동물의 아픈 부위를 먹게 되면 그 병이 났는다는 미신에 대한 이야기 임과 동시에 그녀의 독특한 친구, 외톨이 소년 '시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시가'가 그녀의 췌장을 먹음으로써 그녀가 '시가'의 몸 안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 했던 그녀의 소망이기도 했다. 

 이렇게 말하면 다소 잔인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남주가 진짜 먹었어?라고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건 이 둘이서 표현했던 그들만의 아름다운 유대의, 그리고 안타까운 사랑의 비밀번호 같은 것이었다. '사쿠라'가 죽어서라도 '시가'의 마음에 남고 싶다는 일종의 암호 같은 것. 



 '시가'는 외톨이었다. 타인에 의한 외톨이가 아니라 자의에 의한 외톨이었다. 그는 그만의 세계가 있었고 그 안에서 사는 것에 만족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사쿠라'의 공병 수첩을 발견하게 되면서 '사쿠라'가 가지고 있던 비밀인 그녀의 췌장병을 알게 되고 그것에 개의치 않아 하는 '시가'의 모습에 호의를 느낀 '사쿠라'는 그와 자신의 비밀을 공유하며 관계를 발전시켜나간다. 

 죽음을 목전에 둔 소녀는 너무나 밝았다. 주변의 어떤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이 거짓된 모습으로, 자신을 안타까워하고 또 걱정하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아 하는 '시가'가 그녀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시가'의 소위 팩트 폭격은 조금 껄끄러울 정도로 심했다. 나만의 느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시한부인 '사쿠라'에게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죽은 뒤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 그녀의 죽음에 대해 논했다. 되려 내가 그의 말에 상처를 받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쿠라'는 그런 그가 좋은 눈치였다. 

 시간이 가면서 둘의 유대가 깊어질수록 '사쿠라'는 자신의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이전과 다른 감정들을 느끼고 오히려 무뎠던 '시가'가 그녀의 죽음을 막고 싶어 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은 눈에 뻔히 보이는 엔딩을 향해서 너무나 가슴 아프게 전진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감동적이고 가슴이 시린 영화는 아니었다. 죽음 앞에서 너무나 당당했던 소녀와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던 소년이 서로 만나 시간을 공유하고 또 그렇게 떠나가면서 안타깝지만 아름다웠던 그 삶의 추억을 단편적으로 바라본 느낌이었다. 슬펐지만 찬란했다. 극적이지도 않았고 또 둘의 사랑이 열렬하지도 않았건만 가슴 한구석의 먹먹함은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처음부터 중반까지 과하게만 느껴졌던 '사쿠라'의 연기도 나에게 만약 1년도 안되는 삶이 남았다면 하루하루 행복하기 위해서 과하게 즐겁고, 기쁘게 살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나니, 그녀의 과한 연기가, 그 웃음과 눈빛, 행동들이 다가올 죽음 앞에서 행복하게 삶을 마감하고자 하는 발버둥 같아 안타까웠다. 

 죽음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다. 삶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도 그런 것 같다. 문득 '시가'에게 '사쿠라'가 선생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던진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시가'는 현재의 시점에서 그들이 다녔던 학교의 선생님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시가'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서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졌다. 

 '사쿠라'는 삶이라는 것을, 살아간다는 것을 '마음을 나누는 것'이라고 정의해줬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서 좋아하고, 싫어하고, 다투고, 웃으며 대화하고 나누어가는 그 모든 행위들이 살아 숨 쉬는 것이라고 했다. 차를 타고 돌아오며 차가워진 바람을 한껏 맞아들었다. 큰 숨을 쉬면서 살아있는 것을 느껴봤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삶을 뭐라고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봤다. 나는 살아간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이다. 

당신은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가. 어쩌면 내일 끝나버릴지도 모를 우리의 삶,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feat. 김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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