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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Jan 11. 2021

천생연분인 줄 알았지

서른 살 어느 날, 내가 반지를 끼고 회사를 갔다.

회사동료들이 무슨 반지냐고 물어봐서 결혼하기로 했다고 했더니 난리였다. 만나는 사람 없는 줄 알았는데 있었냐며 만난 지 얼마나 되냐고 해서, 내가 하나, 둘  손가락을 꼽다가 말했다. 19일. 그 동료의 말이 맞다. 20일 전까지는 만나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내 결혼은 빠르게 진행이 되었고, 이후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는 질문은 정해져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결혼을 결정할 수가 있었어요? 만나자마자 딱 이 사람이다 느낌이 오나요?', '저도 모르겠어요. 근데 저랑 되게 잘 통해요.' '인연은 따로 있나 보다. 그렇게 결혼할 상대를 딱 알아보는 걸 보니까'


잘 통하긴 개뿔. 나와 남편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다.

어쩜 이렇게 다른지, 다른 걸 꼽아보라고 하면 하루가 부족할 지경이다.

나는 닥친 일은 정신없이 해치우는 편이다 보니, 집에서 벌어진 큰 일은 내가 먼저 소매 걷어 부치고 처리하곤 다. 반면, 남편은 모르는 일을 알아보고 진행하는 것은 서툰 편이다.


지금 집으로 이사하면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생에 쓸 운을 다 몰아서 청약이 당첨되었고, 전셋집에서 첫 내 집으로 이사 오는 거여서, 이전 이사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많이 복잡했다. 살고 있는 전셋집이 타이밍 좋게 빠져야 하고, 새 집 마지막 중도금을 마저 기한 내에 치러야 하고, 아이들 전학도 시켜야 했고, 다니던 학원과 유치원을 이사갈 곳에서 알아봐야 했고, 은행 업무도 관공서도 다녀야 하고. 이게 정리가 되고 나서는 또 새로운 프로젝트인 이사를 준비해야 했다. 이사업체를 알아보고,  한 날 여러집이 이사 들어가는 거라 같은 라인에 있는 다른 집과 엘리베이터 사용시간까지 따져서 이사 시간을 조율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와중에 남편이 한 딱 한 가지 일. 집에 있던 Wi-Fit 세트를 떼어 내어 차로 옮기는 것. 이유는 비싼 거라 손탄다고. 그렇게 눈에 띄는 게 이사 도중에 분실이 될까 싶었지만 너무 바빠서 하지 마라 이런 소리를 할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는 이사업체 사람들이 있을 때 꺼내놓아야 설치까지 다 해주는데 다 철수하고 나서 기기 그대로 거실에 옮겨놓기만 해서, 결국은 아들이 다 연결했다.

얼마나 분했으면 십 년도 더 지난 일을 적는데 한 번도 막히지 않고 술술 써 내려간다.


요즘은 나도 재택근무이긴 하지만, 이전에 나는 주로 사무실로 외부로 돌아다니는 일을 하고, 남편은 계속 집에서 일했다. 남편 성격상 누구를 만나는 일도 꺼려하고, 그런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집에서 혼자 하니, 가족 외에는 만날 사람이 없다.  

내가 저녁에 집으로 들어오면, 남편은 이것저것 '바깥세상'에 대해서 물어본다. '날씨가 어떻냐?', '그 속 썩이던 회사 사람은 요즘 어떻게 지내냐?'라며 나를 통해 자신을 세상과 연결한다. 그럼 나는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어느 집 사는 이야기 그런 것들을 전해주곤 했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또 얼마나 다이내믹한가. 진상 부리는 직원, 누구하고 누구 하고 싸운 이야기를 하면, 남편은 아침 드라마 챙겨 보듯이 다음에 그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물어보곤 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바깥사람이고 남편이 안 사람이다.


좋아하는 취향도 다르다.

드라마나 영화를 예로 들자면, 나는 드라마는 '시그널'같은 추리물을 좋아한다. 복선이 있으면서 그게 나중에 어떻게 풀릴지 알아차렸을 때의 쾌감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영화도 뭔가 숨어있는 뜻이 많고 두고두고 생각할 수 있는 종류를 좋아한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보면서, 많은 등장인물들이 어디에서 마주치고 누구와 연관이 되어있는지 관계도를 그려가면서 두 번 세 번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남편이 좋은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단 한 가지.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느냐. 많이 죽일수록 좋은 영화이다. 그래서 최애 영화가 '반지의 제왕'이다. '어벤져스 인피니트 워'를 안봐서 순위가 안 바뀐 듯하다.  남편의 기준에 의하면 지구의 절반이 죽는 이 영화보다 더 좋은 영화는 없을텐데 말이다. 남편이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드라마는 '전원일기'이다. 아무런 복선도 없고 권선징악이 뚜렷해서 반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100% 예측 가능한 스토리를 좋아한다. 전원일기가 한 회 끝나면서,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적은 없다. 에피소드에서 누군가가 다투더라도 전혀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결국은 김회장님이 중재해서 다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남편은 이렇게 조금의 긴장도 허락하지 않는 스토리를 좋아한다.


나와 같아야 좋은 짝인가?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른 남편을 이해하느라 결혼 초반부터 한동안 힘들었었다. 분명 눈에 콩깍지가 씌워서 '우리 둘은 통하는 게 많아요'라고 말했을 때는 공통점이 많다고 느꼈을 텐데, 살면서 보니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만난 듯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전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이십 년째 배우고 있다. 이제는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구나' 약간 감을 잡을 수 있는 정도까지는 온 것 같다.


어떤 사람이면 나와 같을까? 나와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 똑같은 사람과 살아간다면 그건 더 좋은 일인가? 생각해 보았다. 아마 서로에 대한 차이점 그 자체보다는, 그걸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몰랐었고 그 점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 이십 년 세월이 우리를 서로에게 좀 더 어울리는 짝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서로가 비슷해서가 아니라, 이십 년 세월 동안 지켜보고 서로에 대해서 배운 시간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게 만든 것 같다.

나는 해치워야 하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빨리 해결을 봐야 하기 때문에, 충분히 알아야 비로소 움직이는 남편이 나설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은 자신이 아는 일은 정확하게 하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일 중에서 남편이 할 일을 알려준다. 그러면, 천상 꼼꼼한 남편은 완벽하게 알아보고 진행한다. 빨리는 하지만 덤벙거리는 나에게는 없는 재능이다.

이렇게 남편을 처음보다는 많이 안다고 하지만, 앞으로도 서로에 대한 이해는 끝이 없을 거고 때로는 도저히 모르겠는 부분에 봉착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를 이해할수록, 그 사람이 안쓰럽다.

남들이 몰라주는 자신만이 간직했을 아픔, 슬픔, 좌절들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프다. 남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때 느꼈던 분노, 답답함이 이제는 측은한 마음으로 바뀐다. 아마도 부부는 이런 측은지심으로 이어나가는 관계가 아닌가,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내게는 남편이 그 어떤 복잡한 영화 플롯에 숨겨진 복선보다 더 풀기 힘든 대상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를 더 이해하면 할수록 내 마음이 더 편해진다. 어쩌면 내가 평생 도전해야 할 복선과 플롯으로 가득한 대상일지도 모르겠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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