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피아 Jan 08. 2021

새해 6일째, 유난히 엉망진창인 날

아직도 2021이라는 숫자가 낯설기만 하다.

오늘이 2020년 12월의 37일, 38일쯤 되는 것 같다. 아마도 한동안 2021이라는 새 숫자는 내게 계속 낯설겠지.

한 해를 시작하면서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 혼자 조용히 생각해 본 것은, '고기섭취를 되도록 줄여보자', '운동을 시작해 보자'정도이다. 예전처럼 동네방네 신년계획을 떠들었다가 어느새 못 지키고 있는 나를 변명하게 될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아무도 몰래 다짐만 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제 6일 차 엉망진창이다.

1월 4일 시무식 때 회사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유난히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제육볶음 앞에서 난생처음 '먹고 싶은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할까'라는 갈등이라는 걸 했다. 그런 생각을 오십 평생 처음 했다는 것도 놀랍기는 하다. 나를 향해 유난히 미소짓는 제육볶음을 용기 있게 패스하고 스스로 장하다 생각하면서 떡국을 자신 있게 푸는 순간, 앗차 떡국 속에 숨어있는 만두를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가 다 아는 맛인 냉동만두를 어쩔 수 없이 먹으면서, 우리나라에서 채식을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적극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고기양을 줄여보자는 다짐인데도 이렇게 장벽이 많으니 말이다.


퇴근을 하고 문장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출발했다.

이때만 해도, 오늘 밤의 귀가가 어떨지에 대해서는 하나도 예측이 되지 않았다. 강의는 언제나처럼 흥미로웠고, 9시에 강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는데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이때쯤이면 앞으로 닥칠 불길한 미래를 점쳤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서야 겨울 분위기가 난다며 너무 섣부르게 웃었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날씨가 춥다고 내복에 목도리에 장갑까지 껴입고 나온 것 까지는 좋았는데, 한쪽 어깨는 노트북 가방, 다른 쪽 어깨는 백팩을 메고 있으니 가뜩이나 둔한 옷차림에 한쪽씩 가방은 교대로 흘러내리고 정신이 없다. 거기다가 안경 쓴 사람이 가진 숙명으로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자꾸 앞이 뿌애진다. 미끄러운 길에 앞이 다 잘 보여도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더더욱 할머니처럼 더듬거린다.

합정에서 을지로 입구까지 지하철로 이동해서, 타고 갈 버스정보를 살펴보니 십분 뒤 도착. 나쁘지 않다. 경기도를 가는 광역버스이고 저녁시간이면 배차간격이 벌어지기 때문에 운이 나쁘면 이십 분도 넘게 기다려야 한다. 십 분이면 중간 정도이니 이 추운 날씨에 이게 어디냐 싶었다. 아. 이때라도 마음을 돌렸어야 했을까. 하지만, 그때 정류장에 서 있던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닥칠 재앙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저마다 이 추운 겨울 길어야 한 두 시간 뒤에 도착할 따뜻한 집으로의 귀가만을 동동거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 지나도록 정류장을 간신히 하나 통과했을 때 일어났다.

소공동 롯데 백화점에서 탄 버스가 명동 백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30-4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거기서부터 남산터널을 통과하고 경부고속도로를 진입해야 하는데 차들이 도대체 움직이질 않는다. 중간중간 내려달라는 승객들이 생겼지만, 나는 이 눈길에 다른 차들이라고 뾰족한 해결책은 없으리라 생각하고 그래도 따뜻하고 발 안 젖는 버스 안이 낫겠지 싶어서 눌러앉는 것을 택했다.


고속도로 진입까지 두 시간 반은 걸렸던 것 같고, 9시에 출발했던 귀가가 12시를 넘길 거라는 뒤늦은 예상은 11시가 되어서도 고속도로를 들어서지 못했던 때에 들었던 것 같다. 버스 안에서는 가족에게 걸려오는 전화에 나지막하게 대답하는 가장의 목소리, '오늘 안으로 못 들어갈 것 같아. 먼저 자.' '아직 서울인데 길이 많이 막혀'라고 상황을 보고하는 자녀의 목소리가 소근소근 들린다. 나도 딸내미에게 '오늘 안으로 못 들어갈지도 모른다'라는 전언을 비장하게 보내고는 그나마 버스 밖이 보이는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장기전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갓길에 세워두고 비상등을 켜고 있는 차들을 보면서 아침에 차를 가져 나올 뻔했던 순간을 아찔하게 떠올리며 그래도 이게 최선이었다고 위로했다.

이 눈길에 운전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운전하는 기사님에게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내면서 목표를 12시 이전 귀가에서 무사히 돌아가는 것으로 바꾸었다.

눈이 펑펑 오는 풍경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다만 그 광경을 집 안에서가 아닌 도로 위 버스 안에서 본다는 장소 차이였다.


온갖 뉴스와 페북을 섭렵하고도 여전히 길 위에 있었고,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일어나 보니 딸의 문자가 와 있었다. '언제 와?' '1시는 되어야 할 것 같아' 엄마의 부재를 걱정해 주는 딸의 문자를 봐서인지,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만은 않게 보였다.


오히려, 이 길 위에서 모두가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싼 외제차를 타고 있는 사람도 나처럼 버스 안에 있는 사람도, 이 막히는 길 내리는 눈 앞에서 속수무책인 상황은 모두 다 같다. 공평하게 좋은 일은 잘 없으니, 공평하게 불행한 상황이 마음 편한가 싶은 씁쓰름한 생각도 들었다.

멀미가 나는 속을 가라앉히느라, 이마를 찬 유리창에 대고 좀처럼 바뀌지 않는 밖 풍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래도 더디지만 이렇게 집을 향해 가다 보면 도착하겠지.

이 상황에서도 많이 불안하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집으로 향하는 옳은 버스를 탔고, 느리지만 이 길은 우리 집으로 향하는 맞는 길이였기 때문이다. 아마, 같은 시간이 걸려서 집에 도착을 했더라도, 내가 길을 모르고 헤매는 상황이었으면 나는 온갖 불안과 걱정에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인생도 이랬으면 좋겠다.

내가 맞는 길을 가고 있다는 믿음 위에서 더디더라도 그 방향으로 한 발자국씩 향하는 것.

새해 결심이 며칠 내에 어그러져도 다시 또 시작해 보는 것.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집으로 가는 버스는 정해져 있지만, 인생의 방향은 어떻게 정하면 되는지? 지도앱이 가르쳐 주지도 않고, 누구에게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은 인생 방향은 어떻게 맞는지 알 수 있는지?

나는 수업시간에도 질문을 참지 못하는 '질문봇'이다. 이렇게 중요하고 어려운 질문은 잊히지 않고 계속 떠오른다. 누가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도 않고,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답이 없는 문제에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질문을 멈추면 내가 인생의 목적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도 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날 1시 20분 아주 이른 새벽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두운 방에서 반겨주는 딸의 목소리에 대답하고, 다른 때보다 더 격렬하게 맞이해주는 강아지에게 인사해 줄 여력도 없이 옷들을 집어던지고는 '아구아구'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주 푹 자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남편이 '그러니까 길이 막혀서 늦게 온 거지?'라고 잠꼬대 비슷한 말을 물어보았지만, 그래도 나는 내 무용담을 늘어놓을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서 이 성의 없는 질문에 시간대별로 상황을 정리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여전히 매일 실패한다.

점심 메뉴는 심사숙고해서 돌솥비빔밥으로 먹었지만, 저녁 메뉴는 보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운동을 자주 하자고 했지만, 지금까지 이틀 아파트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그래도 20층이니 만만하지는 않았다. 10층부터는 진지하게 눈 앞에 보이는 저 엘리베이터를 집어타고 싶었지만, 한 층 올라가고 헉헉거리고 계단을 부여잡았지만 완주를 했다.

나는 그래서 가끔 성공한다. 그게 아예 계획을 세우지 않아서 실패할 가능성을 전혀 만들지 않았던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아무 생각 없었다면 먹었을 고기를 몇 끼를 줄일 수 있었고, 조금이라도 운동을 했으니까.


몇 안 되는 새해 결심도 엉망진창인데, 하나를 더 추가하려고 한다.

내가 조금씩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질문을 멈추지 말자. 나를 의심해 보자. 그렇다면 내가 나가는 더딘 속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총 4시간 20분이 걸린 귀가에서 얻은 하나의 배움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반민초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