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피아 Dec 28. 2020

나는 반민초파

인터넷에 민초파, 반민초파라는 말이 떠돌길래, 대충 무슨 뜻인 줄 가늠만 했다.

민트초코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에 대한 말이겠지. 내 기호에 따라 대답하면 되니, 별 어려운 질문은 아니다.

나는 반민초파. 반민초파가 내세우는 대부분의 이유는 '왜 치약을 돈주고 사먹어야 하느냐?'일거다.

둘 중에 선택은 간단했지만, '왜?'라는 질문을 달고 사는 나는 또 이런 일들을 쓸데없이 진지하게 다큐로 받아 파보기 시작한다.


사람의 취향, 선호도는 다 각각이며 그 종류는 얼마나 많을까? 음식, 패션, 사람들이 소유하고 즐기는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의 취향이 있기 마련이다. 그 많고 많은 취향 중에, 민트초코는 호불호가 단순하고 분명하다. 민초이면서, 반민초이기는 힘들다. 짜장면, 짬뽕은 종이를 들고 주문을 재촉하는 종업원 앞에서 쫓기면서도 한 번 더 갈등하게 만드는 질문이지만, 민초는 언제나 분명하게 주저함 없이 어느 쪽이라고 답할 수 있다.

TMI로 짜장면, 짬뽕 질문의 압박에 못 이기고 결국은 볶음밥을 선택하는 불행한 경우도 봤다. 밥 먹는 내내 압박에 굴복한 본인이 선택한 결정에 대해서 두고두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나처럼 아예 제3의 독립노선을 취하면 이럴 일이 없다. 늘 마파두부덮밥이기 때문에.


이런 즉각적인 질문으로 나와 취향이 같은지 알아보고 싶은 젊은 사람들의 놀이라고 이해한다. 민트가 원래 있었고 그 향을 이용해서 치약을 만든 것인데, 사람들은 민트를 치약 맛으로 먼저 인식하니 다소 불공평하기도 하다. 향도 강하지만, 뱉어야 하는 치약을 삼킨다는 상상이 민초파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나는 반민초이지만 민초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사람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의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다양하다.

나는 또 다른 논란의 대상인, '부먹 대 찍먹'에서는 찍먹을 양보할 마음이 없다. 달고 신 음식을 안 좋아하는데 탕수육 소스가 딱 그 대표적인 음식이므로 간장을 찍어 먹기 때문이다.

아들은 미역국을 못 먹는다. 이 경우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기피 음식에 해당한다. 어렸을 때 미역국을 먹고 토한 경험이 있어서 학교 다닐 때도 급식에서 미역국은 아예 받지를 않았다. 반면에 내게는 인생의 소울푸드가 미역국이다. 이 맛있는 걸 같이 경험하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내가 미역국을 먹고 싶을 때 아들에게는 다른 국이 필요한 번거로움만 있을 뿐 큰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족 아닌 남들과 밥을 같이 먹게 되면서부터는, 늘 내가 이 음식을 왜 안 먹는지에 대해서 해명해야 한다. 그것도 새롭게 만나는 사람한테마다. 더군다나 그 사람들 중에, 그 음식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상황은 더 곤란해진다. '왜, 왜 안 먹어? 이 맛있는 걸?' 내가 그렇다는데, 거기에 합당한 이유를 조목조목 들어 설득해야 할까? 그냥 그런 거지.


요즘 육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다.

육식에 대한 고민은 앞서 말한 기호, 호불호의 문제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육식을 하지 않는 범위부터, 그렇게 결심하게 된 이유도 역시 다양하다.

예전에 같은 학교에 다니던 학우는 계란, 우유도 먹지 않는 비건이어서 내가 건넨 빵도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아 당황스러운 적이 있었다. 또 이전 회사에서 채식만 하는 외국 손님을 데리고 식당에 가서 음식 설명을 하는데, 김치도 역시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아 새삼 놀란 적도 있었다. 젓갈이 들어가니까 채식이 아니었던 거다. 나에게는 당연했던 구분이 틀릴 수도 있는 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환경 때문이다. '인간들이 이 지구를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문제에서 내가 자유롭나?' 하는 질문이 코로나가 한참인 이때에 생겼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시도를 해보고 있다. 그동안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하고, 내 눈 앞에만 보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문제를 마주치게 되면, 내가 불편해진다. 빨리 다른 행복한 생각으로 그 불편함을 덮고 싶고, 그 문제를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또 잊고 살고 싶어 진다.

그 순간에 주저하기로 했다. 좀 더 불편한 채로 있어보기로 했다.


당장에 결론이 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냥 덮지 않고 내가 어디에서 불편한 마음이 드는지 어떻게 하면 그 불편함이 근본적으로 해결되겠는지 공부를 해 볼 예정이다.

요즘 오십견으로 오른쪽 어깨가 불편해서 어깨를 쓸 때마다 조심부터 한다. 불편하니까 늘 그 존재를 지각하게 된다. 예전에는 내가 오른쪽 어깨를 쓰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않고 그냥 했던 행동들을 지금은 모두 나노 단위로 의식한다. 팔을 이만큼 뻗었을 때 아팠는지, 조금 더 움직여도 될런지, 오늘은 좀 더 아픈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불편함도 있는 이유가 있을 거다. 그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냥 있지 말고 애써 고민해 보라는 신호로 생각해 본다. 내가 육식을 앞에 두고 이전처럼 자유롭지 않고 뭔가 주저하게 되는 이유.

불편함을 공부해 보겠다. 민초파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나름 파헤쳐 보는 것처럼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지랖이 병이면, 나는 중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