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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Dec 27. 2020

오지랖이 병이면, 나는 중환자

'엄마 또 오지랖'

딸과 같이 길을 걷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내게 한 마디 한다. 내가 반대편 횡단보도에 서 있는 엄마와 어린아이를 보면서, '손 좀 잡아주지. 횡단보도 앞인데'라고 혼잣말을 했더니 딸이 하는 말이다. 나는 아이들은 언제 튀어나갈지 모르니까 항상 길을 걸어다닐 때는 엄마가 아이 손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길 건너편이라 내 혼잣말이 들릴 리도 없지만, 나 혼자 불안해서 그 가족이 무사히 건너갈 때까지 지켜본다. 오지랖 맞지.


솔직히는 철자가 맞는지 확신이 안 서서(오지랍인지, 오지랖인지 헷갈렸다), 맞춤법을 찾아보다가 오지랖의 뜻을 찾아보았다. '웃옷이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이란 뜻이고 '오지랖이 넓다'가 '지나치게 아무 일에나 참견하다'로 쓰인다. 겉옷의 앞자락이 지나치게 넓으면 안에 입은 옷들을 다 가려버리니까 원래 기능보다 과하게 일을 한다 뭐 그런 의미로 이해했다.


마트에서 아장아장 꼬마가 혼자서 마구 달리고 있길래, 보호자가 없나 싶어서 아이를 막아 세운 적도 있다.

그랬더니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애기 엄마가 어디선가 달려와서는 애기를 데려간다. 나는 행여나 저러다 아이가 보호자를 잃어버리게 될까 봐 누군가 애를 애타게 찾고 있지는 않나 아이를 제지한 건데, 보호자가 잘 지켜보고 있었다니 머쓱해졌다. 그때도 딸아이에게 똑같은 오지랖 잔소리를 들은 것 같다.  보호자 입장에서는 누군가 낯선 사람이 자기 아이 앞을 막아섰으니 그게 더 놀랄 일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러지 말았어야 되나 싶기도 하다.


항변을 하자면 이렇다.

걱정이 되서이다.

아무리 남의 집 일이라고 해도, 또 그런 일이 닥친다면 나는 오지랖을 펼칠 것 같다. 만의 하나의 확률이라도 내가 걱정하는 나쁜 일이 생길까 봐 그런거다.


나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사람이다. 이전 회사에 있을 때 주위에서 아무리 눈치를 줘도 당당하게 회식자리는 참석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라는 깃발을 강요하고 그 밑에 모이는 것 자체를 몸서리치게 싫어한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보더라도, 특히 아이의 안전은 나도 모르게 걱정되어 어디를 가든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의 뒤를 쫓고 있다. 눈을 띄지 못하는 건, 걱정 때문만은 아니고 아이가 너무 예뻐서 쳐다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내 못 말리는 아이 사랑 때문에 오지랖도 나오는 듯하다.

개인마다 경험에 따라 특별히 더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있을 거다. 그게 나는 아이들이고, 누군가는 길거리의 어르신이 다 남 같지 않고 그럴 수 있겠다.

옷의 앞자락은 모양새에 따라 적당한 크기가 정해질 수 있지만, 관심의 크기를 어디까지로 정해야 오지랖이 되지 않는 걸까?


오지랖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한 마을이 필요하다'면, 나는 오지랖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아이의 안전을 걱정하고, 혹시 미아가 되지 않을까 뒤쫓아가 주는 것. 마을 어른들이 모두 한 아이의 안전을 생각하고 주의 깊게 보아준다면, 아이들에게 생길 수도 있는 나쁜 사고는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그런 만약의 가능성을 위해서, 나는 내 옷 앞자락을 기꺼이 넓힐 것이다. 오지랖 넓다고 핀잔 한 번 받으면 그만이다. 아이들이 안전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비단 아이를 위해서만 온 마을이 필요한 건 아닐꺼다.


'그건 오지랖'이야 라는 방패 뒤에 내 비겁함을 숨겨보지는 않는지 생각해 본다. '그건 남의 집 일이야', '괜히 나섰다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여'라고 그저 점잖은 지나가는 행인 역할에만 충실하지는 않은지.

세상이 많이 험해지니, 얼마만큼의 용기를 내고 얼마만큼의 남에 대한 관심으로 참견을 해야 할지가 애매해졌다.


나이가 들면서, 균형을 맞추는 게 참 중요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많은 일들이 정답이 없다. '중용'이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것이 아닌, 어느 쪽에도 지나치지 않게 절묘한 중심점을 맞추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라떼는 말이야'는 옛날 일만 늘어놓고 요즘을 이해하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을 강요만 하는 사람에 대한 농담이다. 반면에, 지난 일은 무조건 퇴물이라고 취급하려는 생각과, 내가 이 말을 하면 '옛날 사람'이라고 취급받겠지 싶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는 것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어리더라도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고 남 말을 전혀 듣지 않으려는 사람은 또 다른 종류의 '라떼는 말이야'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경계하려는 것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일률적인 자신의 해답만을 반복하는 것이지, 지난 일에 대한 추억까지 도매급으로 희화화시키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남에 대한 관심과 오지랖도 같은 맥락이다. 어떻게 균형을 맞출 것인가? 결국은 균형을 맞추는 데 가장 필요한 기준 역시 또 본질이다. '우리는 왜 남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같이 사는 사회여서 그런 거고, 더 일이 나빠지기 전에 막을 수 있다면 그래야 하기 때문이고, 나쁜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이게 오지랖이지 않을까?'라는 스스로가 내세우는 변명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웅 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온 인류를 혼자서 구하는 것보다, 마을의 한 사람씩 한 오지랖씩을 해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길거리에서 만난 아이에게 눈길을 보낼 거고, 핸드폰을 쳐다보면서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아이에게는 특별히 눈을 떼지 않을 거다. 그러다가 혹여 빨간 불인데 발을 뗀다면 남이 뭐라 하더라도 꽥 소리를 지를 것이다. 난 우아하지 않아도 되고, 주책맞다고 누군가가 생각해도 된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한 가지씩 주책맞은 일을 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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